삐라 멈추면 남북관계 풀릴까?

MB 정부 안일한 인식이 파국만 자초...말 아닌 실천 필요

김경환 기자 / kkh@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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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년대에나 볼 법한 '삐라'가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던 정부의 의욕이 지나쳤는지 정부 출범 10개월만에 2~30년 전으로 이 나라를 되돌린 듯한 풍경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문제가 되는 삐라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서 날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삐라가 남북관계 파탄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다. 삐라 입장에서는 억울할 지도 모르겠다. '난 예나 지금이나 날아가고 날아오고 있을 뿐'이라고 변명할 지도 모르겠다.

과연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는 삐라 때문일까? 삐라를 멈추면 남북 사이에도 봄이 찾아오는 것일까?

대북 삐라 살포
  •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의 회원 10여명은 20일 오전 김포시 월곶면의 한 야산에서 대북 전단 10만장을 날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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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못막나 안막나

북측은 단단히 화가 났다. 지난 10월 2일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북측은 "삐라 살포가 계속되면 개성공단 사업과 개성관광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삐라 800여 장이 담긴 상자를 남측을 향해 집어던졌다.

지난 12일에는 "12월 1일부터 1차적으로 군사분계선을 통한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 차단할 것"이라고 했다.

군사분계선을 통한 모든 육로통행을 엄격히 제한하면 개성공단은 문을 걸어잠글 수밖에 없다. 당장,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이 난리가 났다. 이대로가다간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쫄딱 망할 판이니 애가 탈 수밖에 없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단은 당장 다음날 "삐라 살포를 즉각 중지시켜야 한다"고 정부에 촉구했다. 삐라를 살포하는 단체들에도 살포 중지를 요청했다.

북측 군부의 두 차례에 걸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태도는 한가로웠다. 청와대는 단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마디 하는 데 그쳤다. 민간단체에서 하는 '적법한 행사'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게 주된 이유였다. 자제요청은 하겠지만 이들이 삐라를 보내는 걸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개성공단 입주자 대표들이 계속해서 압박하자 정부는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지난 13일 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삐라를 중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겠다"라고 밝혔다.

뒤늦게 사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어쨌는지 정부는 지난 19일 홍양호 통일부 차관 주재로 청와대.총리실.통일부.외교통상부.국방부.경찰.국정원 등 유관기관 국장급 간부가 참석한 회의를 열어 대북 삐라 살포와 관련한 동향을 분석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정부는 민간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행위가 남북간 합의사항 이행차원에서 비람직하지 않으며 현재의 남북관계 상황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며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와 관련 "유관부처 합동으로 법적인 범위 내에서 적극 대처하기로 했다"고 회의결과를 전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20일 다시 10만여장의 삐라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풍선을 타고 북쪽 하늘로 날아갔다. 미리 언론에도 공개된 삐라 살포 현장에는 두어명의 경찰만 왔을 뿐, 이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정부가 운운한 '적극 대처'는 결국 말뿐이었다.

이쯤 되면 정부가 과연 막을 의지가 있는 것이냐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정치권에서도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정부가 남북관계 파탄을 막기 위해선 삐라 살포를 중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정부는 단속을 하고 민간단체는 정부의 합의대로 삐라살포를 즉각 중단하는 것이 현 남북관계의 어려움을 푸는 제일 빠른 길"이라며 "남북 정부가 상호비방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을 민간이 지키지 않는 것은 국제외교 관례로 봐서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정부는 지금까지 대북삐라살포를 방관하고 오히려 즐기다가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 등 강경하게 나오니까 단속하는 척 ‘쇼’를 하고 있다"며 "경제를 이 꼴로 만들고 남북관계까지 이 꼴로 만드는 정부가 한심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최철국 의원은 아예 수소 등 특정고압가스를 대형풍선 및 애드벌룬 등에 주입해 선전물을 뿌리거나 광고 홍보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고압가스안전관리법' 개정안을 내겠다고 했다.

최 의원은 "일부 대북단체들이 수소 가스를 대형풍선에 주입해 공중에 띄워 삐라를 뿌리고 있는데 삐라를 담은 풍선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터지게 되면 남쪽이든 북쪽이든 사람이 다치게 된다"며 "정치적 이유를 떠나서라도 안전상의 이유로 대형 풍선에 수소 가스를 주입해 대북 삐라를 살포하는 행위는 멈춰야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박승흡 대변인은 "수소가스에 실려 북녘으로 날아가는 대북 삐라는 남북관계를 파괴하는 수소폭탄 그 자체"라며 "남북관계 악화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대북 삐라 살포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변인은 "통일부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며 "대통령은 삐라 살포 중단을 요청하는 대국민 호소문이라도 발표해야 할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단 살포를 막는 적극적 조치가 선행되지 아니하고, 계속 방관자적 자세로 일관한다면 12월 1일 북측의 전면 차단조치는 피할 수 없다"며 "뒤이어 더욱 강경한 조치가 내려질 것이고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삐라 막으면 남북관계도 풀릴까?

현재의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여야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야당은 자칫하다간 그야말로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심각함을 드러내는데 반해 여권에서는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공성진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2003년께부터 해오던 삐라 살포에 대해 북이 지금 적극적인 공세를 하는 것은 건강이상설이 도는 지도부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측면과 미국 정권교체기에 통미봉남의 빌미를 잡기 위한 측면이 있다"면서 "적극적인 단속 주장은 단편적인 시각"이라고 말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는 20일 삐라를 날리는 현장에서 "지난 5년동안 전단을 보냈는데 이제 와서 당국이 문제 삼는 것은 최근 경색된 남북관계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처사"라며 "개성공단의 중단 여부는 경제적인 문제일 뿐 전단 살포와는 다른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한미관계가 좋은데 북한문제가 무슨 문제냐"고 했고, 김하중 통일부장관도 '통미봉남은 착각'이라고 했다.

이같은 반응은 북이 '삐라'를 문제 삼는 건 단순한 '엄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소리다. 이러니 진지한 대책이 나올리가 없다. 정부가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한 것도 북측에 '봐라.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중론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을 다녀온 최성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은 이런 정부의 태도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이 금강산관광재개에 대한 관심도 있고 우리 정부가 유화적 태도를 보이니까 전면차단 상황을 피하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런 상황은 극히 희박하다"면서 "6.15-10.4선언에 대해서도 '다른 합의들과 함께 이행방안을 논의해 볼 수 있다'고 대충 얼버무리는 선에서 사안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라고 못박았다.

실제로 정부가 삐라를 막는다고 해도 곧바로 남북관계가 풀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박상학 대표 말대로 삐라는 이미 5년전부터 날리고 있었다.

이쯤에서 왜 이제서야 북측이 삐라를 문제삼는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현 사태가 왜 벌어졌고 어떻게 흘러갈 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북했던 이들에 따르면 북측인사들은 공식적으로는 삐라 문제에 대해 "최고수뇌부의 존엄을 해치는 중대한 자주권의 훼손"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삐라 내용이 온통 김정일 북 국방위원장을 비방하는 원색적인 표현과 내용들로 가득차 있는 까닭이다.

북이 격노하는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북이 '남북관계 단절'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온 배경에는 남측 정부가 그동안 보여준 일련의 행위에 대한 강한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대선과정에서부터 이명박 정권이 집권한 몇 달 간 북은 별다른 논평이나 입장을 내지 않고 남측 정부의 태도를 주시해 왔다. 대북문제에 대해 남측 정부가 어떤 태도와 입장을 갖고 있는 지 모색하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이 정권은 위험한 발언과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 군사분야에서 위험한 행동이 나왔는데, 김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불거지자 '급변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빌미로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거나 PSI(대량살상무기방지체계) 공식참여를 검토하겠다거나 하는 발언들이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 수장인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입에서 나왔다.

여기에다 북한인권법 공동제안국에 참여하는 등 북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시도로 이해되는 방향의 각종 정책과 발언을 쏟아냈다. '비핵개방3000'이라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도 '핵폐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측으로서는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것이냐'는 공분을 샀다.

정부가 말로는 '6.15 선언이나 10.4선언을 비롯한 과거 남북간의 합의사항을 이행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통일운동 인사들을 구속하고, 10.4선언에서 합의한 남북총리회담과 경협회담은 중단,전면검토하겠다고 나서는 이중플레이를 펼친 것도 불신을 키웠다.

북측 인사는 최성 부의장에게 "과거 최고수뇌부가 합의한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핵무기 훈련하고 이러면서 대화하자는 건 우리를 몰라도 너무 모를 뿐만 아니라 한판 붙자는 거다"라고 했다. 정부가 뒤로는 경제인 등을 특사로 내세워 접촉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두고 "협잡꾼이나 하는 짓"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말'만 하다간 정말 파탄 날 것"

최성 부의장은 지금 상황에 대해 "삐라 문제로만 좁혀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북측이 가장 상징적 사건으로 삐라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고, 당장 북측에 주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영향이 크기 때문에 군부가 직접 제기한 것"이라며 "만약 보수단체가 삐라를 중단했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복원되고 금강산 관광이 복원되느냐? 이미 결정된 남북관계 차단이 약간의 시기적 완급을 조절할 수는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미국의 북한인권법을 본따 만든 한나라당의 북한인권법만 통과되도 삐라와 마찬가지로 다른 형태의 대북감정을 자극하는 논란이 된다는 지적이다.

북측이 제시한 12월1일까지는 며칠 남지 않았다. 파국을 피하는 해법은 없을까?

최 부의장은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 전환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남북관계가 정말 파탄이 날 것"이라면서 "일단 대북삐라 발송을 중단시켜 임박한 위기를 완화시켜내고 대통령이 직접 6.15-10.4선언의 이행약속을 보다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약속해야 한다. 또 이미 폐기된 것과 다름 없는 '비핵개방 3000'을 완전히 폐기시켜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민주당 남북교류협력특위도 "(정부가)이제라도 6.15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의 계승 및 포괄적 이행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이것만이 화해협력의 기조 위에서 남북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13일 한국일보와의 특별회견에서 "지금 남북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느냐, 대화와 화해의 길로 가느냐는 심각한 기로에 서 있다"며 "정부가 6ㆍ15 남북공동선언과 10ㆍ4 정상선언, 개성공단 기숙사 건설, 금강산 관광 재개, 대북 전단지(삐라) 살포 문제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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