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경고도 없이 피란민들을 학살 했어”
[연속기획] 미군의 둔포 민간인 학살사건
아산시 둔포면 둔포리. 더없이 평화롭고 한가로운 마을이었다. 녹음이 무르익어가는 산줄기는 마을을 휘감으며 펼쳐졌고, 수확의 기쁨을 기다리는 넓은 들녘은 농부를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노성교 다리 밑으로는 냇물이 살랑살랑 소리를 내며 흘렀다. 마음만 먹으면 두 걸음에 건널 수 있을 만큼 폭이 작은 하천이었다. 나지막하게 뻗은 강둑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잎과 샛노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후덥지근하지 않은 날씨라면 매끄러운 통나무를 깔고 앉아 풀피리를 불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냥 평안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학살된 피란민들의 유해가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피해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현재 수백여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루한 여름비가 그치고 막 먹구름을 거둔 찬란한 햇빛이 대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처럼 그 모습이 구슬프고 숙연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미군 제트기의 폭격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은 300여명의 영혼이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듯하다.
사전 경고도 없이 피란민 폭격
1951년 1월 18일. 지독한 겨울이었다. 차가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큰 눈과 함께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와도 볼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다시 피란길에 오른 민간인들은 사나운 날씨와 피곤에 지쳐 쉴 곳이 필요했다. 꽁꽁 얼어붙은 길을 쉼 없이 걸으면서 마지막 힘까지 소진한 상태였다.
피란민들은 경기도 평택과 아산을 연결하는 노성교를 지나 둔포마을에 들어갔다.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었던 이들은 둔포리 462-11번지 주택과 면사무소 창고에 몸을 숨기고 짐을 풀며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골랐다. 하지만 피란 생활은 쉽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먹을거리도 문제였지만 이가 덜덜 떨리고 살갗이 시퍼렇게 변하는 추위 때문이었다.
오후가 되자 하얀 진눈깨비까지 내려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한 피란민들은 어떻게든 몸을 녹일 방법을 간구해야 했다. 결국 이들은 장작과 마른 풀을 그러모아 불을 지폈다. 줄곧 그랬던 것처럼 전쟁은 극한의 피로와 공포를 감내하도록 만들지만 그 순간만큼은 몸을 따뜻하게 덥히는 게 시급했다.
모닥불은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활활 타올랐다. 너무도 따뜻하고 온화한 열기였다. 오그라들었던 피란민들의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갑자기 멀리서 불쾌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미군의 ‘쌕쌕이(제트기)’ 엔진 소리였다. 피란민들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설마’하는 마음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미군이 전쟁과 관계없는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온 제트기는 피란민들이 거주하던 건물에 항아리 크기의 폭탄 2개를 떨어뜨렸고, 잠시 후 귀를 찢는 듯한 굉음소리와 함께 흙더미와 불기둥이 높이 솟아올랐다.
건물은 산산조각 부서졌고, 잿더미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 안에 있던 피란민들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몸과 팔다리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탔다. 심한 부상을 당한 이들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차례차례 숨을 거뒀다. 시커먼 핏덩이를 토하면서 두 눈을 치켜뜬 채 죽음을 맞았다.
정부 양곡창고가 있는 둔포마을은 평소에도 피란민들이 밥을 지어먹기 위해 자주 불을 피던 곳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이렌 소리도 없었고, ‘인민군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불을 끄라’는 경고도 없었다. 단지 차가워진 몸을 녹히기 위해 불을 피운 민간인들에게 미군은 잔혹한 죽음의 전령을 내려 보냈다.
지독한 폭음과 함께 의식을 잃은 김인태(당시 10살)씨가 기적처럼 깨어났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온 뒤였다. 천지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간간히 사나운 바람소리만 을씨년스럽게 윙윙거렸다. 그는 뭔가 무거운 것에 짓눌려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폭격으로 무너진 잔해더미였다.
몸 위에 쌓인 건물 잔해를 걷어내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김씨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불에 타거나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시체들만 즐비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20여리 떨어진 백석포리로 몸을 피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심한 폭격 후유증을 이겨내야 했다. 입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토하기 일쑤였다. 폭격의 충격으로 다리뼈마저 탈골돼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지독한 아픔이었다.
김씨는 일사후퇴 때 아버지, 어머니, 동생 두 명과 함께 경기도 김포를 떠나 사흘째 되던 날 둔포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먼저 도착한 피란민들로 넘쳐 났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가옥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간에서 잠을 청했다. 그 이후 그는 아버지와 두 동생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겨울이 끝나가고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 수소문 끝에 어머니가 찾아왔다.
“모친이 불에 데 눈썹도 타고, 입도 일그러져 있었어.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나를 보면서 얘기하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았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 어찌나 몰골이 처참하고 서러웠는지.”
그는 다시 폭격 현장을 찾았다.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마을 주민들과 의용소방대원들은 폭격장소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노성교 옆 하천 둔치와 마을 텃밭에 구덩이를 파고 들것으로 수백구의 시체를 날라 묻었다. 폭탄이 떨어져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도 시체 60여구가 나왔다.
당시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정무선(75)씨는 “대전으로 피란 갔다 돌아와 보니 아수라장이었다”면서 “나도 면사무소 앞 채소밭 고랑에 흙과 함석을 뒤집어쓰고 죽어 있던 10여명을 거먹다리(현재 노성교) 근처 강둑에 옮겨다 묻었다”고 증언했다.
스스로 자존심을 짓밟지 마라
미군의 둔포민간인학살사건은 세상에 겨우 알려졌다. 300여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생존했지만 이들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 그대로 역사 속에 묻혔다. 피해자들이 모두 피란민이었기 때문이다.
둔포마을 원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모두 피란을 가고 없었다. 대신 마을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마을주민 김희종(79)씨는 “피란민들 중에는 이북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 것도 큰 문제였다. 이날의 상활을 증언해줄만한 이들이 늙고 병들어 진상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생존자는 김인태씨 뿐이다.
김씨는 1990년부터 진상을 밝혀달라고 청와대에 진정을 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탄원서를 내고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2007년 들어서야 비로소 진실화해위의 조상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의 노력 때문이었다.
“지금 경기도 연천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로 이사한 것도 피란민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서야. 근데 여기에서도 생존자를 찾지 못했어. 어떻게 하겠어. 혼자 싸울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는 진실화해위의 업무진행이 너무 느려 화가 단단히 나있다. 더디고 더딘 진실규명과 유해발굴에 잔뜩 분이 실린 표정이다.
“노무현 정부가 ‘진실화해위’라는 기관을 만들었어. 근데 화살은 박정희, 박근혜에 있었지. 전쟁에서 인권유린을 당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그 다음이었어. 이제까지 진행된 유해발굴이 고작 3~4건에 불과하잖아. 진실화해위에서 둔포마을에 묻힌 유골의 훼손을 방지한다고 지난 5월에 간판 세우는 일을 발주했어. 근데 아직도 세우지 않았어. 물어보니까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해. 그렇게 하려면 때려치워야 돼. 얼른 문 닫는 게 나아. 이런 식이라면 백년 해도 못해. 피해자들 다 죽고 할 거야. 이러면 스스로 인권유린 당한 것을 자학하는 정부가 되는 거야. 감사를 들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해.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야. 한나라당이 집권하면서 예산도 깎이고, 인원도 축소됐어. 어떻게 할 거야. 언제 다 할 거야.”
그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기에 바빴던 미국에게도 할 말이 많다.
“한국전쟁 때 원치 않은 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고의든 아니든 전쟁의 피해에 대해서는 묻기 애매한 부분이 있지. 다만 비전투 지역에서 벌어진 과실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해. 하지만 미국은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고 숨겼어. 진심으로 사과하고, 학살된 지역에 비석이라도 세웠어야지. 이웃집에서 정답게 살다가도 애들끼리 사고 치면 치료비라도 줘야 하는 거야. 미국은 비밀문서를 폐기시켰어. 한국 정부도 묵인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 후세를 위해서라도 꼭 규명해야할 일이야. 지금 촛불 많이 들잖아. 이런 일로 촛불을 들어야 제대로 된 촛불이 돼. 학생들 교과서에도 실려야 되고.”
김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노동자교회를 운영하며 목회활동을 하다 은퇴하고 선교, 복지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어른들의 폭력에 신음하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국회에 들어가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던 아동학대법을 한 방에 처리하도록 만든 전설적인 인물. 그는 기자에게 다시 비장의 카드를 내민다. 속병 앓느니 직접 부딪쳐보겠다는 심사다.
“진실화해위에 한 번 찾아가야 되지 않겠어……. 둔포와 피해규모가 비슷한 노근리는 명예회복이 됐잖아. 정확하게 진상도 규명하고 보상도 받아야지.”
노성교 다리 밑으로는 냇물이 살랑살랑 소리를 내며 흘렀다. 마음만 먹으면 두 걸음에 건널 수 있을 만큼 폭이 작은 하천이었다. 나지막하게 뻗은 강둑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잎과 샛노란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후덥지근하지 않은 날씨라면 매끄러운 통나무를 깔고 앉아 풀피리를 불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냥 평안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학살된 피란민들의 유해가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피해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현재 수백여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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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포민간인학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김인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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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지루한 여름비가 그치고 막 먹구름을 거둔 찬란한 햇빛이 대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처럼 그 모습이 구슬프고 숙연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미군 제트기의 폭격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은 300여명의 영혼이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듯하다.
사전 경고도 없이 피란민 폭격
1951년 1월 18일. 지독한 겨울이었다. 차가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큰 눈과 함께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와도 볼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다시 피란길에 오른 민간인들은 사나운 날씨와 피곤에 지쳐 쉴 곳이 필요했다. 꽁꽁 얼어붙은 길을 쉼 없이 걸으면서 마지막 힘까지 소진한 상태였다.
피란민들은 경기도 평택과 아산을 연결하는 노성교를 지나 둔포마을에 들어갔다.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었던 이들은 둔포리 462-11번지 주택과 면사무소 창고에 몸을 숨기고 짐을 풀며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골랐다. 하지만 피란 생활은 쉽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먹을거리도 문제였지만 이가 덜덜 떨리고 살갗이 시퍼렇게 변하는 추위 때문이었다.
오후가 되자 하얀 진눈깨비까지 내려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한 피란민들은 어떻게든 몸을 녹일 방법을 간구해야 했다. 결국 이들은 장작과 마른 풀을 그러모아 불을 지폈다. 줄곧 그랬던 것처럼 전쟁은 극한의 피로와 공포를 감내하도록 만들지만 그 순간만큼은 몸을 따뜻하게 덥히는 게 시급했다.
모닥불은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활활 타올랐다. 너무도 따뜻하고 온화한 열기였다. 오그라들었던 피란민들의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갑자기 멀리서 불쾌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미군의 ‘쌕쌕이(제트기)’ 엔진 소리였다. 피란민들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설마’하는 마음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미군이 전쟁과 관계없는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온 제트기는 피란민들이 거주하던 건물에 항아리 크기의 폭탄 2개를 떨어뜨렸고, 잠시 후 귀를 찢는 듯한 굉음소리와 함께 흙더미와 불기둥이 높이 솟아올랐다.
건물은 산산조각 부서졌고, 잿더미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 안에 있던 피란민들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몸과 팔다리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탔다. 심한 부상을 당한 이들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차례차례 숨을 거뒀다. 시커먼 핏덩이를 토하면서 두 눈을 치켜뜬 채 죽음을 맞았다.
정부 양곡창고가 있는 둔포마을은 평소에도 피란민들이 밥을 지어먹기 위해 자주 불을 피던 곳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이렌 소리도 없었고, ‘인민군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불을 끄라’는 경고도 없었다. 단지 차가워진 몸을 녹히기 위해 불을 피운 민간인들에게 미군은 잔혹한 죽음의 전령을 내려 보냈다.
지독한 폭음과 함께 의식을 잃은 김인태(당시 10살)씨가 기적처럼 깨어났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온 뒤였다. 천지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간간히 사나운 바람소리만 을씨년스럽게 윙윙거렸다. 그는 뭔가 무거운 것에 짓눌려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폭격으로 무너진 잔해더미였다.
몸 위에 쌓인 건물 잔해를 걷어내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김씨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불에 타거나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시체들만 즐비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20여리 떨어진 백석포리로 몸을 피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 달간 머무르며 심한 폭격 후유증을 이겨내야 했다. 입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토하기 일쑤였다. 폭격의 충격으로 다리뼈마저 탈골돼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지독한 아픔이었다.
김씨는 일사후퇴 때 아버지, 어머니, 동생 두 명과 함께 경기도 김포를 떠나 사흘째 되던 날 둔포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먼저 도착한 피란민들로 넘쳐 났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가옥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간에서 잠을 청했다. 그 이후 그는 아버지와 두 동생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겨울이 끝나가고 얼음이 녹기 시작할 무렵, 수소문 끝에 어머니가 찾아왔다.
“모친이 불에 데 눈썹도 타고, 입도 일그러져 있었어.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나를 보면서 얘기하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았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 어찌나 몰골이 처참하고 서러웠는지.”
그는 다시 폭격 현장을 찾았다.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마을 주민들과 의용소방대원들은 폭격장소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노성교 옆 하천 둔치와 마을 텃밭에 구덩이를 파고 들것으로 수백구의 시체를 날라 묻었다. 폭탄이 떨어져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도 시체 60여구가 나왔다.
당시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정무선(75)씨는 “대전으로 피란 갔다 돌아와 보니 아수라장이었다”면서 “나도 면사무소 앞 채소밭 고랑에 흙과 함석을 뒤집어쓰고 죽어 있던 10여명을 거먹다리(현재 노성교) 근처 강둑에 옮겨다 묻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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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피란민들이 묻혀 있는 노성교 인근 강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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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말
스스로 자존심을 짓밟지 마라
미군의 둔포민간인학살사건은 세상에 겨우 알려졌다. 300여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생존했지만 이들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 그대로 역사 속에 묻혔다. 피해자들이 모두 피란민이었기 때문이다.
둔포마을 원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모두 피란을 가고 없었다. 대신 마을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마을주민 김희종(79)씨는 “피란민들 중에는 이북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 것도 큰 문제였다. 이날의 상활을 증언해줄만한 이들이 늙고 병들어 진상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생존자는 김인태씨 뿐이다.
김씨는 1990년부터 진상을 밝혀달라고 청와대에 진정을 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탄원서를 내고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2007년 들어서야 비로소 진실화해위의 조상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의 노력 때문이었다.
“지금 경기도 연천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로 이사한 것도 피란민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서야. 근데 여기에서도 생존자를 찾지 못했어. 어떻게 하겠어. 혼자 싸울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는 진실화해위의 업무진행이 너무 느려 화가 단단히 나있다. 더디고 더딘 진실규명과 유해발굴에 잔뜩 분이 실린 표정이다.
“노무현 정부가 ‘진실화해위’라는 기관을 만들었어. 근데 화살은 박정희, 박근혜에 있었지. 전쟁에서 인권유린을 당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그 다음이었어. 이제까지 진행된 유해발굴이 고작 3~4건에 불과하잖아. 진실화해위에서 둔포마을에 묻힌 유골의 훼손을 방지한다고 지난 5월에 간판 세우는 일을 발주했어. 근데 아직도 세우지 않았어. 물어보니까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해. 그렇게 하려면 때려치워야 돼. 얼른 문 닫는 게 나아. 이런 식이라면 백년 해도 못해. 피해자들 다 죽고 할 거야. 이러면 스스로 인권유린 당한 것을 자학하는 정부가 되는 거야. 감사를 들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해.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야. 한나라당이 집권하면서 예산도 깎이고, 인원도 축소됐어. 어떻게 할 거야. 언제 다 할 거야.”
그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들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기에 바빴던 미국에게도 할 말이 많다.
“한국전쟁 때 원치 않은 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고의든 아니든 전쟁의 피해에 대해서는 묻기 애매한 부분이 있지. 다만 비전투 지역에서 벌어진 과실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해. 하지만 미국은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고 숨겼어. 진심으로 사과하고, 학살된 지역에 비석이라도 세웠어야지. 이웃집에서 정답게 살다가도 애들끼리 사고 치면 치료비라도 줘야 하는 거야. 미국은 비밀문서를 폐기시켰어. 한국 정부도 묵인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 후세를 위해서라도 꼭 규명해야할 일이야. 지금 촛불 많이 들잖아. 이런 일로 촛불을 들어야 제대로 된 촛불이 돼. 학생들 교과서에도 실려야 되고.”
김씨는 경기도 안산에서 노동자교회를 운영하며 목회활동을 하다 은퇴하고 선교, 복지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어른들의 폭력에 신음하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국회에 들어가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던 아동학대법을 한 방에 처리하도록 만든 전설적인 인물. 그는 기자에게 다시 비장의 카드를 내민다. 속병 앓느니 직접 부딪쳐보겠다는 심사다.
“진실화해위에 한 번 찾아가야 되지 않겠어……. 둔포와 피해규모가 비슷한 노근리는 명예회복이 됐잖아. 정확하게 진상도 규명하고 보상도 받아야지.”
- ©월간 말
- 기사입력: 2008-08-27 12:09:04
- 최종편집: 2008-09-03 14: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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