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정기의 서대문형무소
연재 사건으로 본 서대문형무소 | 해방후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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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100년의 서대문형무소
올 해로 서대문형무소가 개설된지 100년이다. 서울 서대문 현저동 101번지 영천금계동에 처음으로 감옥이 설치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 10월 21일이다. 일제가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들을 구속 수감하기 위하여 감옥을 만든 것이다. 처음 명칭은 경성감옥이었다. 옛부터 금계동(金鷄洞)은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라 하여 명당으로 알려진 마을이었다. 이곳에 현대식 대형감옥을 지은 것이다.
이에 앞서 1904년 7월 14일 종로에 있던 대한제국의 감옥 전옥서(典獄署)가 경무청 감옥서로 개칭되고, 4년 뒤인 1908년 4월 11일 경성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같은 해 10월 21일 금계동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그 후 다시 4년만인 1912년 마포형무소가 경성감옥이란 명칭으로 설립되면서 이곳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고, 1923년에 서대문형무소라는 명칭을 거쳐 해방뒤인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뒤에 서울교도소로 바뀌었다가 다시 1967년 7월 7일 서울구치소로 개명되었다.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의 사연만큼이나 명칭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감옥은 1923년부터 23년 여 동안 일제강점기에 서대문형무소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숱한 애국지사를 고문하고 생명을 앗아감으로써 겨레의 원부(怨府)가 되었다. 해방 뒤에는 수많은 민족지사와 통일운동가, 민주인사, 노동운동가, 학생 등 정치범과 양심수가 고난을 겪은 성지가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사람들 중에는 살인범을 비롯하여 강겴壎?등 잡범과 이른바 국사범도 끼었다. 해방 뒤에는 한 때 이들 ‘잡범’의 수가 더 많았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기 시작하면서 1907년 7월 조선통감부칙령 제1호로 경시청 관제를 공포하여 대한제국의 경무청을 대신하는 경시청을 설치하고 감옥업무를 경찰업무에서 분리시켰다. 통감부의 본격적인 감옥업무는 1907년 12월 칙령 제52호로 감옥서의 관할을 내부에서 법부로 옮기고 감옥관제를 새로 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일제가 조선의 사법권과 감옥업무를 빼앗은 것은 1907년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통해서이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협박하여 조선군대의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의 위임 등을 골자로 하는 신협약을 강제하였다. 이에 따라 사법권도 일제로 넘어가고, 1907년부터 그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수많은 의병들을 투옥시키기 위한 대형 감옥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듬 해에 서대문감옥을 새로 지었다.
일본인의 설계로 지어진 이 감옥은 당시 화폐로 5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였다. 금계산자락 30여만 평에 지은 감옥은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시설로 수용인원은 500명 정도였다. 당시 전국 8도 8개 감옥의 총 수용인원이 30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규모가 큰 감옥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행형과장과 서대문형무소장 등을 지낸 일인 나카하시는 서대문형무소 신축과 이전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경무고문은 장차 사회의 변화에 따라 범죄인이 크게 증가될 것을 예측하고 경비 약 5만원을 들여 인왕산 금계동에 감옥의 신축을 착수하였다. 건물의 설계를 본국(일본)에서 전옥을 지낸 사천왕수마(四天王數馬)가 맡았다. 이 신축감옥은 전부 목조로 하였고 주벽은 전면의 일부만 벽돌로 하고 그 외는 모두 아연판을 붙인 판자로 하여 허술한 점이 있었지만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 감방 및 부속건물 480평에 건축구조는 감방의 순경·시찰·환기 및 방풍을 고려하여 T자 형으로 하고 외초(外哨)와 순찰로를 설치하여 계호상 편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감방은 주간에는 어둡고 매우 침침하여 이 점만은 결점이었다. 하지만 공장, 목욕실 그 외 필요한 시설을 갖추었으며 수용능력은 500명 정도였다. 이와 같이 신 감옥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당시 군대해산병이 폭도화하여 성(城-서울) 외는 어수선하였고, 신제(新帝, 순종) 즉위 후 정무가 혼잡하였지만 사법기관(일제헌병, 경찰기관 등-필자)을 창설하였고, 이에 따라 송도감옥은 더욱 수용난을 겪게되어 이곳(종로감옥)은 구치감으로 하여 미결수만 수용하고 기결수는 모두 신감옥으로 옮겨서 수용인원을 조정하였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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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유관순 굴’로 불리는 지하감옥도 복원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일제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한국 여성들을 투옥겮側㉶歐?위하여 1916년 지하에 여감옥 여사(女舍)를 만들었다. 지하 독방에는 비중이 있는 애국지사들을 수감하여 가혹한 문초와 고문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다가 1934년에 옥사를 고치는 과정에서 지하감옥을 매립하였다.
정부가 1992년 독립공원으로 조성할 때 발굴, 복원한 이 지하감옥의 면적은 190㎡이며, 사방 1m 도 안되는 독감방 4개가 있다. 특히 이곳은 유관순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곳으로 일명 ‘유관순 굴’이라고 불린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8월 1일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와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그 때마다 잔학한 고문이 자행되고 지하 독방으로 격리수용되었다. 유관순열사는 1920년 10월 12일 거듭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가 토막살해를 하였다는 주장도 전한다.
일제가 수감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했던 담장과 망루의 일부가 현재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1907년 담장을 설치할 때는 나무기둥에 함석을 붙였으나, 현재의 붉은 돌담은 1923년에 설치한 것이다. 담장의 높이는 4.5m, 길이는 1천161m였으나 현재는 앞면에 79m, 뒷면에 208m만 남아 있다. 망루는 6개소 중 2개소만 원형대로 보존하였는데, 8면에 감시청이 설치되어 있고 높이는 10m이다. 정문의 망루는 1923년에 설치했으며, 뒷 쪽 망루는 1930년에 만든 것이다. ②
이렇게 지어진 이 감옥은 서대문형무소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되면서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애국지사 4만여 명이 구속 수감되어 온갖 악형에 시달리고 그중 400여 명이 처형ㆍ옥사 등으로 순국하였다. 해방 뒤에는 한 때 이광수 등 거물 친일파,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항일진보적인 국회의원들을 비롯하여 양심수 수천 명이 수감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 3.15 부정선거 원흉 최인규, 정치깡패 이정재, 육영수 저격범 문세광, 북한노동당 부부장 황태성, 위장 귀순간첩 이수근, 인혁당 관련인사 8명, 박정희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중앙정보부장, 강력범 고재봉ㆍ김대두ㆍ박철웅ㆍ주영형 등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서대문형무소가 항일애국지사들의 원과 한이 맺힌 원부이고 성지였다면, 해방 뒤에는 통일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양심수들의 한과 원이 맺힌 고난의 상징이 되었다.
강우규ㆍ이인영ㆍ송학선ㆍ김동삼ㆍ채기중 등 의병대장과 수 많은 독립운동가, 애국소녀 유관순 열사가 이곳에서 처형 또는 옥사를 당하였다. 33인 민족대표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군사정권 때 수많은 청년ㆍ학생ㆍ노동자들이 이곳에서 극심한 옥살이를 하였다.
미군정 실시와 암살ㆍ테러 발생
일제의 항복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얼마나 한국사정에 어두웠는가, 한국인들이 미겮?분할 통치에 얼마나 실망하는가, 한 미국 언론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존ㆍRㆍ하지 중장은 미육군 제24사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을 이행할 연합국 최고위층의 정책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설사 연합국의 정책이 있다 해도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가 아는 내용은 미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 맥아더장군으로부터 받은 명령뿐이었다.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고 법질서를 유지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현정부 체제를 유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처음엔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이끄는 조선총독부를 계속 유지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미군을 하늘이 보낸 해방군으로 여겨 열렬히 환영한 한국인들에게는 충격이요, 실망이었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반응은 미국의 점령정책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는 한국에 도착한지 5일 후 아베총독을 해임했고, 그로부터 2일 후에는 총독부의 일본인 고위 관리들을 해임했다. 그리고 미군정 간부들이 속속 도착하는 대로 나머지 일본인관리들도 모두 신속히 해임할 계획이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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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청은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물론 해방 뒤 전국 각지에서 생겨난 인민위원회ㆍ치안대 등 각종 자치 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키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조선인 행정관리들을 인계받아 통치했다.
또한 영어를 잘하는 지주출신의 보수계열 인사들을 행정고문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 과거의 친일관료, 경찰, 지주 등 반민족적 인사들의 재등장 과정이 되었다. 김구의 임시정부 핵심세력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여기서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ㆍ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가 만든 각종 악법을 폐지했으나 신문지법ㆍ보안법 등은 존속시켜서 점령통치에 활용하였다.
해방과 함께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해방군’은 점차 ‘점령군’으로 변하고, 신탁통치, 통일정부수립,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문제 등으로 정치세력이 갈라졌다. 각기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노선을 달리하거나 정파가 갈렸다. 한때 남북합작세력이 목소리를 내고 남북을 오가면서 분단을 막고자 노력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리차드 라우터백은 저서 『한국 미군정사』에서 미군 상륙 후 1년간 유력한 정치가는 우익진영의 이승만ㆍ김구, 중간 우파의 김규식, 중간 좌파의 여운형, 좌익진영의 박헌영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이들 외에도 해방공간에서 수많은 인물이 군웅할거하며 주의ㆍ주장을 폈다.
미군정이 남한의 해방공간을 주도하는 가운데 1946년 5월 6일과 10월 21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미ㆍ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한반도 정세는 분단정부 수립쪽으로 급속히 전환되었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기고 이승만은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미군정 당국의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은 날로 강화되었다. 조선정판사위폐사건(1946. 5. 15), 『해방일보』폐간(5.18), 전평본부 급습(8.16), 좌익지도자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9월 초),『조선인민보』,『중앙신문』,『현대일보』폐간(9.6) 등이 행해지고, 지방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미군과 지방경찰에 의해 분쇄되었다. ④
이와 함께 각종 테러가 난무하여 정치지도자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조선공산당은 이에 맞서 9월 총파업과 대구10월 항쟁을 일으켰다. 미군정 경찰은 8월 12일 좌익통일전선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산하의 각 정당, 사회단체 및 진보적 언론인의 전면적인 검거에 나서는 한편, 민전의 8.15 해방 2주년 기념대회 개최를 불허하는 행정명령 제2호를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경찰기구를 총동원하여 반대세력에 대한 일대 검거를 시작하였다. 군정청의 발표에 의하더라도, 피살 28명, 중상 2만1천명, 검거ㆍ투옥 1만3천769명이었으며, 이날부터 남한의 모든 혁명세력은 비합법화되어 지하투쟁을 하게 된다. ⑤
구속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의 감옥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때 체포된 인사 중에는 조선공산당의 이주하ㆍ홍남표ㆍ김삼룡 등이 포함되고, 박헌영ㆍ이강국은 도피하여 끝내 잡지 못하였다.
미군정기에 암살과 테러가 일상화되고 감옥은 다시 정치사상범으로 채워졌다. 송진우ㆍ여운형ㆍ장덕수ㆍ김구가 암살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암살과 정치테러가 일어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암살’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의 극한치, 즉 ‘전부에 대항하는 하나(One Against All)’나 혹은 ‘하나에 대항하는 전체(All Against One)’와 다른 ‘준비된 폭력’으로서 피해당사자가 전혀 감지할 수 없는 불공정한 행위다. 즉 ‘준비된 폭력’에 의한 ‘준비하지 않은 죽음’이 곧 암살인 셈이다.”⑥ 이 무렵의 정치테러에 부합되는 지적이다.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의 감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정치인의 정치적 발언이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의 중심이었던 허헌의 발언에서 감옥의 실상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이승만정부의 보도에 의하면 1948년 1월부터 1948년 10월까지 약 10개월 동안에 총검거 인원수는 13만 6천360명인데 그 중 기소 투옥된 동포의 수는 4만 4천162명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3천여 명 수용하던 서대문감옥에만 현재 감금된 인원이 6천 명에 달하는데 그 중 4천여 명이 민주주의적 투사들입니다. 불완전한 이 단편적 자료로서만 보아도 얼마나 잔인무도한 야만적 폭압입니까?”⑦
미군정기에 암살과 정치테러가 빈발하고 좌익의 저항이 치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 연구가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군정의 미국식 국가운영 방식과 분단구조 아래에서의 우익의 편승은 자연히 좌익의 저항을 유도했고 소련의 사전적 조종과 기획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 국내사회주의집단의 조직적 저항이나 ‘준비된운동’ 차원에서 커져가는 항거의 결과였다.”⑧
미군정이 좌익세력의 정치활동을 봉쇄하고 이승만중심의 우익세력이 단독정부수립의 방향으로 해방정국이 진행되면서,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더욱 중요한 사단이 되었을 것이지만, 친일파들의 득세와 치솟는 물가고 등 복합적 요인으로 각지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하였다. 여수ㆍ순천사건, 대구ㆍ경북 10월항쟁, 제주 4ㆍ3항쟁 등이 잇따르고, 이에 대한 미군정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국민이 살상ㆍ투옥되었다.
“아주 불완전한 자료에 의하여도 1946년 9월부터 1947년 9월 동안에 경찰에만 살상된 애국자와 인민들의 수는 1만 3천932인에 달하였습니다. 1948년 2월 7일부터 5월 22일까지 약 3개월 반간에 351명이 학살되었다고 유ㆍ피(UP) 기자는 보도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공식발표에 의하여도 동년 10월 22일부터 11월 20일까지 약 1개월간에 여수ㆍ순천에서 소위 군법회의를 거쳐 학살된 인민의 수는 수만을 산할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또한 이승만정부의 보도에 의하면 1949년 3월 한 달 동안에 전라남도에서만 학살된 애국동포들이 1천178명에 달하고 4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역시 전남 한 도에서만 564명의 동포들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주도 한 도에서 작년 4월 3일 이래 금년 3월 말에 이르는 약 1년 동안에 3만여 명의 동포가 학살되었고 2만여 호의 민가와 195개의 부락을 태워 버리었다는 사실은 세인이 다 아는 바입니다.”⑨
이와 같이 미군정기와 이승만정부 초기에 발생한 암살ㆍ테러ㆍ민중봉기의 현상은 독립된 신생국가 국민들에게는 참극이었다. “해방공간이 주는 ‘과잉기대감’과 외삽국가체제로 미군정이 요구하는 우익적 질서구축의 강경한 권유가 서로 부딪치는 가운데 결정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던 국내 지도자들의 치열한 의식적 경합이나 그로 인해 정치적 긴장의 균형이 분쇄되어 나가는 매우 이례적인 ‘폭력 도미노’였다.”⑩ 라는 주장은 장덕수 암살에 대한 분석이지만, 전체적인 암살겾瀏칮민중봉기의 원인에 대한 해답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무렵 서대문형무소와 관련된 두 사람의 행적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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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룡 이주하와 서대문형무소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김삼룡(金三龍, 1910~1950)은 1930년 11월 사회주의 독서회를 조직한 혐의로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경성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해 여름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이재유를 만났다. 1932년 2월 출옥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하다가 겨울에 인천부두 하역인부로 취업하고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1934년 4월경 이관술과 무명의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다. 1940년 3월 경성콤그룹에서 조직부와 노조부를 담당했다. 이 무렵 이순금과 비밀리에 결혼하고 12월 일본경찰에 피체되었다.
1945년 8월 전주형무소에서 출옥하여 9월 조선공산당 조직국원으로 선출되고,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조공을 대표해 축사했다. 그해 잡지 『민심』 주간을 지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좌익정치 지도자들의 비밀연석회의에 참석하고, 12월에 남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 및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3월 남·북로당 합동정치위원회에 참석하고 7월 남로당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1949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50년 3월 경찰에 검거되어 6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⑪
이주하(李舟河, 1905~1950)는 함남 북청 출신으로 보광학교 재학 중에 3?운동에 참여한 뒤 갑산광산으로 피신했다. 그 뒤 원산에서 객주집사환, 일본인 상점 점원, 우편국 전보배달부 일을 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3학년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했다. 니혼대학(일본대학) 재학 중에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고 찌바(千葉)에서 공산청년동맹에 가담했다가 1928년 한때 검거되었다. 그해 5월 학비부족으로 귀국하여 원산부두에서 노동에 종사하고 원산노동연합회에 가입했다.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당재건운동에 참여했다. 이즈음 신간회 원산지회 조직부위원이 되고, 1930년 5월 반일 격문 살포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31년 원산지방노동조합운동에 참가 ‘제1차 태로사건’에 연루되어 1933년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36년 출옥하여 원산으로 돌아가 원산공산주의자그룹을 결성하고, 일경에 조직이 노출되어 관계자에 대한 검거가 있었으나 피신하여 흥남겳翩?평양에서 지하운동을 계속 중 해방을 맞았다. 1945년 8월 원산에서 조공함남지구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결성, 조공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및 서기국원으로 선임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해 말 서울로 와서 이듬해 2월 조공중앙 및 지방동지연석간담회에 중앙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이어서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 민전중앙위원이 되었다. 1948년 4월 이후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하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1월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들과 남한혁명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3월 서울에서 안영달의 밀고로 김삼룡 등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김삼룡과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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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나카하시, 『조선구시(朝鮮舊時)의 형정』, 총독부 치형협회 발행, 1937.
② 이 부분은 서대문형무소의 이해를 위하여 졸저 『서대문형무소근현대사-일제시대편』내용 중 일부를 인용,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③ 『뉴스위크(NEWSWEEK)』, 1946년 1월 28일자, 「미ㆍ소 ‘두개의 코리아’ 분할통치」.
④ 조국,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의 사상통제법」,『역사비평』, 계간창간호, 330쪽, 1988.
⑤ 조국, 앞의 글, 331쪽.
⑥ 박종성, 『한국정치와 정치폭력』, 159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⑦ 심지연, 『허헌연구』, 405쪽, 역사비평사, 1994, 허헌의 이 자료는 1949년 6월 25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서 「국내외 정세와 우리의 임무에 대한 보고」내용이다.
⑧ 박종성, 앞의 책, 169쪽.
⑨ 허헌, 앞의 책, 404쪽.
⑩ 박종성, 앞의 책, 219쪽.
⑪ 강만길ㆍ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79쪽, 창작과 비평사, 1896.
⑫ 앞의 책,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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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나카하시, 『조선구시(朝鮮舊時)의 형정』, 총독부 치형협회 발행,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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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입력: 2008-07-25 11:28:43
- 최종편집: 2008-07-31 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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