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평화 기행

오키나와 소바와 치비치리가마의 기억

참소리 한선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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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국의 동북아지역 군사재편에 맞선 공동행동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오키나와, 일본의 반기지 평화활동가들은 미군기지로 인한 소음, 환경문제등의 피해가 심각함을 공유하고 4월 12일 한국, 오키나와, 일본이 공동으로 '미군기지 환경조사연구 국제심포지엄'을 오키나와 국제대학에서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미군기지로 인한 피해와 문제점을 알리는데 힘써온 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 군산미군기지 피해상담소, 녹색연합,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평택평화센터, 금속노조만도지부평택지회의 활동가들이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이번 평화기행은 국제 심포지엄 참석과 함께 오키나와 미군기지 순례, 지자체와의 간담회, 평화 활동가들과의 교류등 다양한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4월 10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4박 5일간의 숨돌릴 틈 없었던 평화기행을 앞으로 5회에 걸쳐 연재를 진행한다.


처음에 오키나와에 도착하기 전 걱정했던 문제 중 하나가 음식문제였다. 일본 음식이 대체로 싱겁고, 양이 적다고 알려져 있어서 싱거운 음식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참에 다이어트라도 할까?’하는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번에 깨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오키나와 소바’였다. 흔히 한국에서 ‘소바’라 했을 때 보통은 시원하게 먹는 메밀소바를 떠올릴 테지만 ‘오키나와 소바’는 그 소바가 아니다. 뜨거운 육수와 밀가루국수에 고기 고명을 얹은 음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소바와는 정반대다.

짭짤한 맛에 굵은 면이 특징인 '오키나와 소바'는 평화기행 내내 즐겨먹는 음식이 됐는데 야채를 듬뿍 넣은 야채소바, 볶은 소바인 야끼소바, 갈비와 삼겹살을 넣은 소바등 종류가 다양했다. 이 모든 소바의 공통점은 양이 많고, 짭짤한 맛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거나 알고 있는 일본과 오키나와가 다른 건 소바만이 아니었다. 역사와 문화, 언어까지도 오키나와는 일본본토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일본이 아니라 오키나와라고 불러 주세요.
오키나와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여가 걸리는 먼 거리에 위치해 있다.(배로는 37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오히려 대만이나 제주도에서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는 옛부터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

오키나와제도는 야마미제도, 오키나와제도, 미야코․야에야마제도로 크게 3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은 류큐왕국이 존재했던 지역이다. 1429년 건설된 류큐(琉球)왕국은 약 200년간 세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00년대 야마미제도는 에도막부시절 본토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두 지역은 1879년(메이지시대)이 되어서야 일본 본토의 직접 통치에 들어가게 된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오키나와와 일본이 한 국가로 묶인 것이 그리 오래된 역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으로 시작된 오키나와의 비극적 역사

세계 2차 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하게 된다. 6월 23일 일본군 사령관이 할복함으로써 일본이 항복 할 때까지 오키나와에선 비극적 전쟁이 진행되었다. 이 시기 오키나와 사람 4명중 1명이 죽을 정도로 많은 민간인 인명피해가 났다.

전쟁의 가슴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오키나와 요미탄촌에 있는 치비치리가마(가마는 한국말로 동굴이란 뜻이다)이다. 당시 15세 이상의 남자들은 모두 징용 대상이었기 때문에 요미탄촌에는 노인과 어린이, 여성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마을사람들은 미군이 상륙하자 치비치리가마로 대피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미군을 귀신으로 묘사하며 미군에게 붙잡히면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남자들은 탱크에 깔려 죽게 될 것이다’고 얘기 했다고 한다.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미국인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공포의 대상인 미군이 기다리고 있는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주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다. 이 비극적 사건으로 동굴로 대피했던 140명중에 83명의 사람이 죽게되었다.

“왜 아이들을 죽였습니까?”
“당신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생존자들의 말을 전한 츠바야 쇼이치씨(요미탄촌 의원)는 “당시엔 동물적 충성심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충성심은 사람들에게 '항복이 아닌 죽음을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18세의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목을 내밀며 "죽여달라"고 말하면서 서로가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오키나와는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갖고 있어 본토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차별받지 않기 위해 더욱 ‘일본인’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오키나와 말과 문화를 없애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일본인화’에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현재는 오키나와의 전통과 문화를 다시 되살리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이들은 일본 본토인들의 오키나와인에 대한 오래된 차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츠바야 쇼이치씨는 ‘집단 자결’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어른도 아이도 자결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이런 비극적 역사를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없어서 집단 자결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포함해 많은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에 의해 죽은 것에 대해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결이라고 말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집단자결이 아닌 일본의 국군주의 교육에 의한 희생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 역사 속에서 이들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살 수 있었지만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치비치리가마의 교훈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사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치비치리가마를 평화학습의 장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오키나와와 아직까지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없는 한국의 상황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오키나와는 이 비극적 역사를 통해 평화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배웠지만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얻은 것일까.

전쟁과 함께 시작된 미군기지의 역사

가슴 아픈 전쟁의 역사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의 역사와도 함께 한다. 1972년까지 미군정의 지배하에 있었던 오키나와는 미군의 점령과 함께 대규모의 미군기지가 들어서게 된다. 미군들은 일본군이 썼던 기지를 확장하거나 주민들의 땅을 몰수해 미군기지를 만들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국토 면적에 1%를 차지할 정도의 작은 면적이지만 주일미군 주둔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을 만큼 일본에서의 미군기지의 비중이 큰 지역이다. 그러다보니 오키나와는 인구밀도가 도쿄보다 높은 6700명이다. 기지가 넓다보니 그만큼 주민들이 살 수 있는 땅이 좁아지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지로 인한 각종 문제와 피해가 심각하다. 미군에 의해 지역 주민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문제부터, 어떤 날은 헬기가 대학에 추락하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시달리는 전투기 폭음 문제, 환경오염까지 그 어느 하나도 예삿일로 넘기기 힘들다. 이런 문제들은 한국의 미군기지에서 벌어지는 문제들과 매우 유사했다.

다음 연재부터는 오키나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 문제와 미군의 군사재편으로 인해 새로 건설되려고 하는 신기지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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