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과 아이들의 미래

[월간 말_컬럼]김태형의 마음 방정식

김태형 | 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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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을 5월로 정한 것은 아마도 산천초목이 생명의 빛깔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이 계절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날에는 바쁜 일상을 잊은 부모들이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때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아이들이 근심걱정 모르고 즐겁게 뛰어놀며 행복하게 자라나길 간절히 염원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고 마음 놓고 노래할 수 있는 어린이날은 일년 중 단 하루뿐이다. 아이들은 이 날에만 반짝 관심을 받고는 위험하고 고단한 세상에 다시 내던져진다.

얼마 전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유괴예방 안전수칙!’이라는 공문을 가지고 왔다. 아마도 혜진, 예슬 어린이의 비극적인 사건과 그에 뒤따른 어린이 대상 범죄들 때문에 공문을 보낸 듯 했다. 공문에는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따라가거나 차를 타면 안 된다.’, ‘혼자 있으면 안 된다.’,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문과 창문을 꼭 잠그고 있어라.’와 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 다 필요한 말이긴 한데 이를 읽는 내 마음은 너무나 무겁고 착잡했다. ‘어린이들에게 이런 교육을 시켜야만 하다니, 세상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항상 어른들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라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주변에 있는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교육받았다. 실제로 나는 어린 시절 낯선 어른들한테 도움을 받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유치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난리로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떤 아저씨가 나를 무등 태워 집에 데려다준 일도 있었고,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른이 몸을 던져 나를 구해주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린 시절 어른들을 전혀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교육받지도 않았다. 아마 내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비슷한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런 교육을 시킬 수 없다. 물론 한때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에는 ‘이웃집 아저씨도 다시 보자.’는 식의 구호들이 난무하여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며 갈라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간첩의 주요목적은 어린이 대상 범죄가 아니므로 적어도 아이들까지 불안에 떨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점에서 어린이들에게 ‘아는 사람이라도 절대 믿지 마라. 그 누구라도 너를 해칠 수 있다.’고 강조해야만 하는 오늘만큼 비극적인 때는 없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왜 이렇게 변해가고 있을까? ‘보릿고개’가 잊혀진 옛 말이 되어버린 첨단 과학기술과 물질적 풍요의 시대임에도 미친 사람이나 범죄자가 많아지고 일반인들도 점점 따뜻한 마음을 잃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면관계상 그 답을 여기에서 다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사회의 발전모델이 사람들의 인격을 파괴하고 그들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만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한국사회의 발전모델은 상당한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해왔다. 결국 우리는 돈과 사람, 돈과 아이들의 미래를 서로 바꿔치기한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죄 없는 아이들의 가슴 아픈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물질적 재부를 우선시하는 성장위주의 발전전략이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미치게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그 길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혜진, 예슬 법을 만들어 범죄자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가하고 아이들에게 유괴예방 교육을 시키며 CCTV를 전 국토에 설치하자는 주장들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은 없다. 댐이 갈라져 물이 새어나오면 시멘트라도 발라 우선 그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댐의 반복적 균열이 원천적으로 수압을 견딜 수 없는 잘못된 설계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면 땜질식 처방은 오래 가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을 구해내려면 물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발전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발전 모델을 선택해야 한다.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기존의 발전모델은 무엇보다도 사회구성원의 마음을 병들게 만들 것이므로 머지않아 그 동력을 상실할 것이다.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사회는 결코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온갖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찬 세상에서 모든 어른들을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자라난 아이들이 정상적인 ‘경제역군’,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아이들이 민중의 힘,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마음 깊이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시골초등학교만 하더라도 3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학교가 끝난 뒤 학원에 가고 집에서는 문제지를 푼다. 학원에 가지 않는 우리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도 같이 놀 친구가 없어 할 수 없이 집에 온다. 그뿐인가. 아이들은 벌써부터 성적에 민감해져 공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친구들 사이에는 질투와 경쟁이 시작된다. 마음씨가 착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거나 운동에 소질이 있거나 시를 잘 짓는 것 따위는 아무 필요도 없다. 오직 성적만이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창의적인 인재육성이나 협동심의 배양 등이 가능할 리 없다. 공부에서 뒤처지는 아이들은 일찌감치 세상에 대한 반항심을 드러내며 문제아의 길로 들어선다.

그 결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부모들은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각종 아동 범죄자들, 사고의 위험, 유해한 식품, 나쁜 매체와 게임, 해로운 친구 등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소모적 노력만으로는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 아이들을 획일적인 공부기계 혹은 낙오자로 만드는 잘못된 교육제도, 아이들로 하여금 타인과 세상을 불신하게끔 만드는 잘못된 환경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이대로 세상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미래를 넘겨줄 것인가? 보수화의 물결이 넘실대는 지금, 한국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길과 희망을 제시해주는 참신한 정치세력의 등장이 너무나도 애타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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