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노동자들의 차가운 시선, 무너진 진보정치 1번지

[월간 말_특집]현장에서 본 진보진영의 총선 성적표, 울산북구

제정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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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닥 가졌던 희망이 바위에 눌린 유리창 마냥 처참하게 깨졌다. 울산북구가 무너졌다. 2008년 총선에서 확인된 울산북구의 표심은 민주노동당에게 ‘충격’ 그 자체라 할 만하다. 1만6,621표 31.84퍼센트의 득표는 진보진영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깃발을 울산북구에 꽂은 이후로 받은 역대 최악의 결과였다. 울산북구-경남창원-경남사천을 진보삼각벨트로 규정하고 총력을 기울였던 민주노동당은 총선 결과가 발표 난 후 ‘울산북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진보정치 1번지 울산북구는 이렇게 세간의 입에서 ‘쉬쉬’하며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울산북구는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지난 2000년 이후 단 한번도 40퍼센트 미만의 득표를 받은 적이 없는 지역이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최용규 후보는, 현대자동차 일부 현장조직이 민주노동당 후보를 대상으로 낙선 운동까지 벌였지만, 1만8,867표 41.8퍼센트의 득표를 얻었다. 당선자인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게 불과 563표 뒤지는 결과였다. 그리고 4년 후, 민주노동당 조승수 후보는 2만7,212표 46.9퍼센트의 득표로 1만9,952표를 얻은 윤두환 후보를 멀찌감치 제치고 금배지를 달았다.
조승수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실시된 2005년 재선거에서 정갑득 후보는 낙선하긴 했지만 45퍼센트 이상을 받았다. 계속되는 선거패배로 기운이 떨어진 채 진행된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울산북구는 광역의원 비례 투표에서 민주노동당에 42퍼센트의 지지를 보내줬다.

민주노동당 이영희 후보
ⓒ <진보정치> 정택용 기자


1998년 실시된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무소속 조승수 후보가 구청장에 당선됐고, 뒤를 이어 2002년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이상범 구청장을 탄생시켰다. 울산북구에 ‘진보정치1번지’란 아성이 붙은 이유다.
다시 지난 4.9 총선의 결과를 살펴보자.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는 친박연대 최윤주 후보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2만4,135표를 얻어 여유롭게 당선됐다. 최 후보는 1만1천여 표를 받았다. 울산 현지는 이번 총선의 패인을 어디서 찾고 있을까.
울산시당 강호석 사무처장은 “최윤주 후보가 윤두환 후보의 표를, 보수 표를 일정부분 잠식했지만 우리 지지자들이 투표를 하지 않아 승기를 놓쳤다”고 말했고, 민주노동당의 최대 표밭인 현대자동차에서 활동하는 김경훈 씨는 “친박연대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표를 다 흡수한 듯 보인다”고 분석했다. 결국 현대자동차 조합원이란 집안단속을 잘하지 못했다는 점이 공통분모다. 물음표는 정치의식 높고, 조직력 강한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이 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았을까에 찍힌다.
총선을 앞두고 현대자동차 공장 안의 정치적 상황은 아주 복잡하게 전개됐다. 민주노동당이 분열함에 따라 현장조직이 각자의 정치적 토대에 따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려졌다. 최종 후보군이 북구-민주노동당 이영희, 동구-진보신당 노옥희로 결정되기 전까지 팽팽한 긴장감도 흘렀다. 한 지역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각자의 후보를 내고 진보내전을 벌일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예상됐다. 다행스럽게 후보가 정리된 뒤에도 현장의 혼란은 이어졌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현대자동차 공장을 한 바퀴 돌고 간 다음날 진보신당 지도부가 또 공장을 한 바퀴 돌고 갔다. 조합원들의 입에선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 누굴 찍으란 거냐”란 짜증 섞인 목소리가 가감 없이 흘러 나왔다. 선거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은 “북구에 사시면 이영희를, 동구에 사시면 노옥희를 찍으면 됩니다. 정당투표는 ㅇㅇ에 해주세요”라고 막힘없이 설명했지만 속옷 아래서는 진땀이 흘렀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지부)이 총선을 사실상 사보타주(태업)한 것도 민주노동당의 속을 태웠다. 공식선거운동에 들어가기 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결의대회에 참석한 윤해모 지부장은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지지하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위반하지 않을 것”이라 말해 관계자들을 안심하게 했다. 하지만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이틀이 지난 3월 27일 현자노조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을 통한 배타적 정치 방침은 이미 현장에서 사문화 되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제고를 정중하게 요청한다”는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한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히면서도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해야 한다는 이 같은 주장은 조합원들을 혼란시키기 충분했다.
물론 현자노조의 이 같은 행동은 사전에 일정부분 예측됐던 바다. 현재 현자노조 집행부는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라는 현장조직이 맡고 있다. 정치단체인 ‘노동자의힘’ 계열의 민투위는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대안으로 민주노동당을 꼽지 않으며, 노동현장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치적 입장도 잘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러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는 자신들의 정치성향을 드러낸 셈. 이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지키려는 현장조직들의 유·무형 압력이 민주노동당 분열로 약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금속노조 중앙의 한 관계자는 “민주노동당 지지를 독려하는 내용이 담긴 기관지 ‘금속노동자’를 발행하는데 현자노조 사무실에 가니 배포도 되지 않은 채 가득 쌓여 있었다”라면서 “현자노조가 사실상 이번 총선 선거운동에 손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다만 현대자동차 현장조직의 한 활동가는 “현자 집행부의 의도라기보다는 민주노동당이 기세가 약하고, 집행부가 속한 운동조직 상층의 견해 때문에 선거운동을 소홀히 한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울산북구 패배의 다른 한 축은 북구집권 8년에 대한 구민들의 매서운 평가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실 민주노동당 이영희 후보가 총선기간에 내놓은 대부분의 말은 북구 구민을 향한 사죄였다. “대형할인매장을 들어서게 해서 장사하는 주민들 힘들게 했”고 “음식물자원화시설 끝까지 고집 부려 중산동 주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고 “협력업체 노동자들, 비정규직 형제들을 위한 땀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구구절절한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이 구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이 표로 이어지는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이란 예측을 한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울산북구의 정치지형을 현자조합원과 그의 가족들 40퍼센트, 한나라당 지지자 40퍼센트, 그리고 유동층을 20퍼센트 정도로 분석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의 선거승패는 유동층 20퍼센트 중 5퍼센트를 누가 가져가느냐에 있다는 것.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의 전략가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이 바로 유동층 5퍼센트의 지지를 어떻게 확보하느냐 였다. 악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조승수·이상범 두 전임구청장이 민주노동당을 떠났다. 한 명은 민주노동당에는 희망이 없다면서 보수정당에 몸을 의탁했고, 의원직 배지까지 달았던 다른 한 명은 민주노동당을 ‘종북주의’라는 신조어로 덧씌웠다. 당원을 구속까지 시켜가며 강행했던 음식물 자원화시설 문제도 여전한 뇌관이었고, 농민들 충고를 무시하고 동천강 제방높이를 낮게 건설해 몇 개월 만에 50여억 원 이상을 물속에 흘려보낸 사건도 문제였고, 학교 앞에 송전탑을 건설해 학부모들의 원성을 샀던 것도 해소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련 사건들을 집행했던 민주노동당 출신의 공직자들은 모두 당을 떠나갔다. 민주노동당 분열상황을 지역언론을 통해 비교적 소상히 접하고 있는 주민들은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원들이 말이라도 붙일라 치면 “왜 분당했냐. 한 게 뭐 있느냐”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한 표가 아쉬운 이번 총선에서 5퍼센트 잡기가 너무나 버거웠던 셈이다.

민주노동당 이영희 후보
ⓒ <진보정치> 정택용 기자


조심스러운 접근이지만 “민주노동당이 그동안 무엇을 했나”란 질문은 공장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최근 현대차 조합원들의 최대 이슈는, 주요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공장별로 천차만별인 작업물량 문제다. 조합원들에게 물량 문제는 임금과 고용안정의 우려로 이어진다. 노동조합이 08년 임단협의 주요안건으로 물량문제를 상정해 놓은 이유다. 그런데 공장 담벼락 안의 이 같은 사안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딱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량문제의 본질인 자동차산업의 불안정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줄 수는 있겠지만, 조합원들은 울산북구에서 민주노동당 구청장과 국회의원이 탄생해도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현대차(대공장) 조합원들이 민주노동당 지역구 의원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분석은 최근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실제 고민거리로 대두되는 듯하다. 울산북구 이영희 선거사무실의 주요 관계자는 이런 분석에 대해 “실제 현장에서 그런 정서가 있기는 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활동가들은 조직노동자들이 진보정당에 표를 던지지 않는 원인을 노동자들 자체에 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활동가들의 특성상 대중들에게 사건(투표율이 낮은 것)의 원인을 떠넘기지 않는 것이 몸에 베어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활동가들의 본업(?)이 이런 대중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조직 노동자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란 분석은, 곧 “당신은 왜 노동자들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가”란 식의 질타에 다름 아니다. 만약 울산북구의 패배가 쟁점이 없는 선거로 인해 낮아진 유권자들의 관심, 분열로 인한 지역유권자들과 현장조합원들의 냉소 등에 진보정치를 보는 조직노동자들의 차가운 시선이 덧붙여 진 것으로 평가된다면 현장활동가들의 향후 발길은 바빠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과 현대차 현장활동가들은 이번 총선의 패배를 “매서운 채찍을 제대로 맞았다”고 보고 있다. 민주노동당에 우호적인 한 현장활동가는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은 상당히 높았지만 이번 선거는 이슈와 쟁점이 없었고, 또 당이 분열해 있어서 조합원들의 관심이 낮았다”면서 “그럼에도 울산 전체에서 민주노동당이 받은 투표율을 보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희망은 여전하다”고 평가했다. 실제 총선을 치른 뒤 이 지역 활동가들은 진보적 지역운동의 새로운 상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공장안. 만약 진보정당의 분열상태가 치유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면 차후 선거에서도 이번과 같은 일은 반복될 공산이 크다.
울산시당 송주석 전 사무처장은 “조합원들이 투표에 대한 절박함을 적게 느끼고 있다는 것에서만 패배의 원인을 찾으면 안 되고 활동가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것에 우선 방점을 찍어야 한다”면서 “조합원들은 분열하는 모양을 보고 실망을 한 것이 확실한 만큼 앞으로 조합원의 마음을 달래는 활동을 해 나가야 한다”고 전망했다. 진보정치 1번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조직노동자를 확실한 우군으로 만드는 작업부터 새로이 출발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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