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진보는 자기를 버리고 역사를 진보시키는 것”
[인물이야기] 이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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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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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는 어린 시절 동네에서 이렇게 불렸다.
몰락한 양반가인 친가와 신흥재벌가인 외가 사이에서 태어나
대문이 열두 개나 있는 큰 집에서 자랐고,
12남매 중 막내였기 때문이다.
평생의 화두가 된 농업, 농촌 문제가 이우재의 머릿속에 크게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예산농업학교 시절이다. 예산농업학교는 일제가 1910년 경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설립했던 신의주, 경성, 이리, 진주 농업학교와 함께 100여년 전통을 가진 학교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심한 병을 앓게 되어 6개월이나 학교에 가지 못하고 병치레를 했던 이우재는 이광수의 ‘흙’이나 심 훈의 ‘상록수’와 같이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책들을 감명 깊게 읽었다. ‘농촌을 부흥시키자’는 꿈을 가슴 깊이 품게 된 것이다. 또 낙농국가 덴마크를 이상적인 모델로 여기고, 70%가 산으로 뒤덮인 우리나라에선 목축이 농업의 미래라고 생각하면서 수의사가 될 전망을 정했다.
오랜 병치레 끝에 졸업장을 받은 후엔 다짜고짜 상경해 명륜동 외갓집에서 생활하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부유한 외갓집의 경제적 도움에 기댈 생각이 없었던 그는 학교 앞에서 연필, 잉크, 물감을 파는 장사도 하고 연탄 불쏘시개를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며 팔기도 했다. 그렇게 ‘농촌부흥운동’을 위해 1957년 서울대 수의대에 입학하게 됐다.
대학 입학 이후에도 고학은 계속됐다. 당시 서울대의 등록금은 굉장히 싼 축에 속했지만, 그나마도 이우재에게는 마련하기 힘든 돈이었다. 다른 대학생들처럼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는데, 그 집에서 등록금은 마련해주지 않았다. “서울대 등록금이라야 그 집 형편에서 근사한 외식 한번 하는 수준 아닌가” 하는 울분이 절로 들었다. 2학기를 휴학하고 친구와 도넛 장사도 해보고 공사장에서 사물통을 지기도 했다. 복학 후에는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차에 똥을 퍼내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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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중심에 서다
낮에는 학업, 밤에는 돈벌이로 고된 대학생활이었지만 ‘농촌 부흥’이라는 꿈은 가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1학년 때부터 진보적인 고민을 가진 문리대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념서클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농촌문제를 대하는 그의 관점은 변화를 맞았다. 자신이 수의사가 되어 농촌에 돌아가는 것을 운동이라 생각했던 그는, 농촌문제가 본질적으로 사회, 경제구조의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을 필두로 반민주적 독재를 일삼던 이승만 정권은 1960년5월로 예정된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긴 3월 15일 실시했고, 공무원을 동원한 온갖 부정행위를 통해 80%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 해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 등 전국적인 학생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무자비한 탄압 속에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했다. 4월 11일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바다에서 떠오르면서 잠재된 분노는 일거에 폭발하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들은 4월 21일을 공동 궐기일로 잡고 준비했다. 이우재도 서울대 공대를 조직하는 연락책임을 맡았다. 공동 궐기를 앞둔 4월 18일에 고려대가 시위를 앞당겨 감행하고 타 대학이 이에 가세하면서 4월 19일에는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대학생들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 자유민주 사수하자”고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과 학생들은 경무대로 향하면서 경찰의 탄압에도 흩어지지 않고 대열을 지켰다. 결국 대열에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곳곳에서 시위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진행된 4.19 혁명으로 인해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4.19 세대’라 불리는 학생들의 힘, 그리고 시민들의 자생적인 혁명이 독재정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4.19 혁명의 기운은 대학 내에서 이어졌다. 서울대는 단과대학 대표 모임을 열어 독재시절 학생조직인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건설했다. 12개 단과대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총학생회장의 역할을 맡았다. 수의대 대표였던 이우재는 학생회 정관을 작성하는 일을 맡으면서, 학생운동만을 전담하는 특수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혁명으로 의식의 전환을 맞은 대학생들은 1961년 공개적이고 본격화된 활동을 시작했다. 그 해 다시 한번 수의대 대표를 맡은 이우재는 ‘신생활 운동’을 통해 국산품 애용, 양담배 커피 금지, 일본음반 배격 등을 주장하면서 다방, 카바레 등을 습격하거나 양담배를 압수하고 불법 수입차의 임시 번호판을 붙인 차를 시청으로 끌고 가는 등 실천 활동을 벌였다. 이우재는 5월 ‘신경제’지에 기고한 글 ‘학생의 신생활운동을 말한다’를 통해 4월 혁명을 “부정과 부패와 독재에 대한 항거였다. 이것이 젊은 학생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서 이루어져 형식적이고 제도적이고 표면적인 변혁은 가져왔다”고 평가한 후 “진정한 혁명은 국민 각자의 정신혁명과 생활혁명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처음으로 자생적인 통일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서울대에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됐고 이우재는 의장단 중 1인으로 선출됐다. 이후 19개 대학이 모인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으로 조직이 발전해 그 해 5월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북에서도 환영의 메시지가 전해졌고 민족일보는 논설을 통해 “남북의 집권자들은 이 학생들의 결의와 행동을 위험시하거나 경원시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성원과 협조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면 정권의 무능력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각종 쿠데타설이 난무하던 것이 혼란스러운 ‘해방 정국’의 시대상황이었다. 이우재는 한 선배를 통해 ‘혁명을 준비하는 세력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김종필과 만나게 됐다. 그를 통해 혁명이 혁신계 인사들이 아니라 군부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낌새를 챈 그는 이들과 발길을 끊었다. 이우재는 훗날 자서전을 통해 “그 때를 생각하면 사람의 운명이 한순간에 결정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 때 내가 앞뒤 안 가리고 참여 했더라면 나는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혀 버렸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즉 이들 세력은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세력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20일. 이우재는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됐다. 민족통일연맹 조직과 관련해 서울대 지도자 5인 중 1인으로 잡혀간 것이다. 6주 간의 유치장 생활을 마치고 그는 심신을 가다듬기 위해 몸담고 있던 남산농촌사회연구회 지리산 농촌계몽 팀에 합류했다. 산간 오지에서 농민들과 함께 땀 흘려 일하면서 한 달을 보내는 사이 마음을 가다듬고 농촌 부흥을 꿈꾸던 초심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 1달을 함께 보낸 이대 대학생 김주숙은 훗날 그의 아내가 되었다.
1962년 대학을 졸업하고 수의사 면허를 딴 그는 농업 문제는 사회, 경제구조의 문제라는 인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건국대 대학원에서 농업경제학을 연구했다. 1965년 사단법인 ‘한국농업근대화연구회’를 설립해 활동하면서 농촌 현장에서 농민지도자들과 만나는 일도 활발히 해나갔다. 연구회 금요강좌를 통해 농민 교육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대학 농촌문제 동아리를 중심으로 농촌운동에 뜻있는 대학생들을 조직해 나갔다. 그 때 만난 인물들이 이후까지 인연을 이어간 황민영과 이재오 등이다. 연구회는 당시로서 거의 유일한 민간 연구기관이었으며 재정 자립을 실현했다. 연구회가 해체 위기에 처하자 참여했던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해 ‘푸른들’이라는 신용협동조합을 만든 것이다. 10여 년간 지속된 연구회 활동을 통해 장상환, 황한식, 박진도, 권영근 등의 인재를 배출해 내기도 했다.
70년대에는 ‘한국농업문제의 본질’이라는 논문을 정리하기도 했다. 한국농업문제의 본질을 토지 문제로 규정하고 저임금, 저곡가 정책 등을 비판하면서 농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농업을 살리기 위한 길로 ‘협업농업’을 제시한 이 글은 당시 농업문제에 관심 있던 대학생, 활동가들에게 필수 교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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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바꾸는 곳, 크리스찬아카데미
1970년대 이우재의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은 바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활동이었다. 강원용 목사가 ‘중간집단 육성’을 목표로 시작한 아카데미는 여성, 노동, 농민, 학생, 종교의 다섯 분야로 이뤄졌다. 여성 분야의 한명숙, 노동 분야의 신인령, 농민 분야의 이우재, 장상환, 황민영, 황한식, 권영근 등이 주도했고, 농민 분야는 총 23기에 걸쳐 1000여명의 교육을 담당했다.
농민교육은 3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와 2단계 교육을 통해 농업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고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찾아나가게 했다. 3단계 교육은 무려 20박 21일 동안 진행되는 장기 전문과정으로, 농업문제에서 더 나아가 경제학, 정치학, 사회사상, 사회운동사, 민족주의론, 조직론, 선전론 등 사회운동가를 육성하기 위한 이론, 실무 교육을 진행했다. 이우재는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 육성’의 뜻을 안고 아카데미 출신 농민운동가를 대상으로 서클을 조직하기도 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사회적인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그 자체는 ‘교육’ 사업이었지만 이곳을 거쳐 간 인물들은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농민회 등으로 들어가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지도세력이 되었다. 1978년 함평 고구마투쟁의 주역인 서경원, 노금노도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농민운동 지도자 정광훈, 강기갑 등도 아카데미 출신이고 문경식은 함평 고구마투쟁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카데미 ‘막내’ 기수였다.
강원용 목사는 자서전 ‘역사의 언덕에서’를 통해 “나는 우리 교육이 계속되었다면 1980년 봄의 혼란을 피하고 5.18의 비극과 군사 정부의 등장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흥분하기도 했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사건과 뒤 이은 남민전 사건으로 아카데미 사업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한국 변혁운동이 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는 평가가 훗날 내려지는 것 자체가 당시 아카데미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아카데미는 독일 재단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교육기관이었지만 사회적인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독재정권의 눈엣가시가 되어갔다.
1978년, 한명숙이 연행되었다. 발단은 아카데미의 ‘내일을 위한 노래집’에 실린 ‘희망가’를 참가자들이 개사해 부른 노래가 ‘불온하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아카데미 수원 교육장 ‘내일을 위한 집’에서 교육을 하던 간사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괴한들에게 연행됐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이다. 당시 언론에는 “중앙정보부는 (4월)16일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회교육원의 간사 등이 불법 비밀 용공단체를 만들어 북괴 노선에 적극 동조하고 불온 활동을 해온 사실을 적발하고 이 서클 대표인 이우재(43, 농촌 간사)와 한양대 사학과 조교수 정창열(42) 등 7명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했다”고 보도됐다. 구속자는 이우재, 한명숙, 장상환, 황한식, 신인령, 김세균, 정창열이었고 참가자 700여 명이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아카데미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비인간적인 고문을 통해 조작된 사건임이 분명했다. 기독교계 등을 중심으로 사건 대책위가 꾸려지고 WCC, CCA, 세계 아카데미운동연합회, 독일 교회연합회, 미국 기독교연합회 등이 항의와 격려를 보내는 한편 조사단을 한국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독일의 샤프 주교는 팔순 노구를 이끌고 5월 27일 직접 방한해 항의했고 이우재를 면회했다. 국내의 관심도 높아 공판이 열릴 때마다 재판정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재판에서 최종 5년형을 선고받은 이우재는 1979년 3월 구속되었고 박정희의 죽음과 유신독재의 종말, ‘서울의 봄’과 신군부의 등장을 감옥에서 지켜봤다. 1980년 광주 5.18. 당시 서울구치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어 있던 이우재는 교도소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헬리콥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선회하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다가, 공중에서 살포된 전단지를 통해 광주 시민들이 무기를 쥐고 싸우고 있는 5.18 광주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스웨덴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아내 김주숙은 사건이 발생하자 바로 귀국해 조작사건을 폭로해 나갔다.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집 앞 수퍼마켓에 갈 때도 형사를 대동해 가야하는 처지였고 대학교수 임용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미국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뚫고 들어가 보좌관들에게 사건을 폭로하는가 하면 재야인사들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가족들과 종교계, 재야인사들의 도움 덕분인지 0.7평 감옥에 3년 5개월을 보낸 이우재는 1982년 8월 15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우재는 석방 후 미국으로 날아갔다. 감옥에 있으면서 농민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다룬 서적이 없다는 고민을 한 끝이다. 미군정을 겪으며 해방 전후사에 대한 모든 기록은 ‘맥아더 노획문서’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건너가 있었다. 당시 CIA는 ‘어느 마을에서 김가와 이가가 싸웠다’는 세부적인 내용까지 매일 리포트를 만들어냈다. 1985년 2월 워싱턴에 도착한 그는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아카이브스 분소에서 자료를 뒤지며 6개월의 시간을 보냈고, 복사해 온 자료로 15권짜리 ‘미군정청보고서’(일월서각 출판)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이어서 앞서 석방된 장상환 등과 함께 ‘한국 농어촌사회 연구소’를 설립했고 농민운동사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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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건설, 그리고 해산
1987년은 항쟁의 해였다. 서울대 박종철 군이 중정에 연행되어 고문 받다가 숨졌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경찰이 자체 수사 결과에서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하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호헌선언’을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을 열망하던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댕긴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리고 6월 10일. ‘직선제 개헌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광주학살처럼 유혈 진압할 것이냐, 갈림길에 놓인 전두환 정권은 결국 민중들의 힘에 밀려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통해 ‘6.29선언’ 즉 항복선언을 발표했다.
4.19 혁명 직후처럼 또 다시 해방공간이 열렸다. 민중들의 힘으로 민주화의 일대 진전을 일궈낸 것이다. 하지만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반영하지 못하고 양김 씨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노태우의 당선으로 끝이 났다.
87년 대선 패배의 경험을 딛고 재야세력은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해 힘을 결집했다. 상임의장 이부영, 사무처장 장기표, 정책기획실장 김근태, 조통위원장 이재오보다 선배였던 이우재는 감사직을 맡게 됐다. 전민련은 결성 세 달 만에 의장 이부영 등이 수배, 구속되는 등 정권의 집중 탄압을 받았다. 또 영등포을 보궐선거에 독자후보 고영구 변호사를 내세워 출마한 일을 시작으로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에 휩싸였다. 1990년 3월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 이부영, 이재오 등이 ‘합법 정당추진 결성에 대한 안’을 제출하면서 논의에 불을 붙였다. 전민련 주류세력이라 할 수 있는 김근태 등은 독자 정당 건설이 야권을 분열시킨다면서 민주연합을 주장하고 있었다. 독자정당 추진세력은 ‘민중의 정당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로 통합되었다. 민연추 내에서도 야당과의 관계설정 논란은 매듭지어지지 않았고 야권통합을 주장하던 이부영, 박계동, 고영구, 제정구 등은 일괄 사퇴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남은 이들은 1990년 11월 10일 이우재, 김낙중, 김상길을 공동대표로 ‘민중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민중당은 창당대회에서 기본 목표를 “외세와 군사독재 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중주체의 민주정부를 수립하며 민중주도의 자립경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의 달성”이라고 선포했다.
한편 1991년 하반기 노동운동 세력 내부에서 ‘노동자정당’ 결성 움직임이 일면서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비합법적 전위정당 노선을 폐기하고 공개적인 노동자 정당노선을 선언하고 나선 이들은 민중당과 통합 문제로 논란을 거듭했고, 총선을 50여일 앞두고 이들 두 세력은 통합을 성사해낸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중당이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느냐를 가름하는 승부처였다. 선거 분위기는 좋았다. 민중당 후보가 지나가면 붙들고 헹가래를 치는 청년들은 물론 다가와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꼭 당선되세요” 라고 말하는 청년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정치의 벽은 높기만 했다.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고 법적인 정당 조건인 득표율 2%의 벽을 넘지 못해 1992년 3월 30일 정당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됐다.
총선 실패 이후 이우재는 지역에서 ‘구로문화센터’를 만들고 ‘한우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꾸려나갔고 이재오, 장기표 등과 모임을 정례화하기 위해 ‘민주사회와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회’를 꾸리기도 했다. 1994년 초에는 김영삼 정부의 농업정책 마련을 위해 대통령 직속기구인 농어촌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김영삼 정권이 군대 내 하나회를 해산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초반 파격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하는 데 주목했던 이들 세력은 장기표를 제외하고 민자당에 입당했다.
80년대 재야 운동권 세력은 87년 대선 패배 이후 88년부터 양김 씨를 따라 각각 기성정당에 입당하면서 흩어지기도 했고, 일부는 국민승리21을 거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민주연합론이 대세를 장악했던 때에 ‘민중당’ 건설을 주도하면서 독자정당 노선을 우직하게 견지했던 이우재 또한 뒤늦게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보수정당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당시 민자당 입당결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인간의 존재는 역사적, 사회적인 존재이고 역사,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존재다. 진보운동을 했으니까 죽을 때까지 안 되도 깃발을 들고 죽어야 하나 하는 갈등이 있었다. 당시의 생각은 진정한 진보는 자기를 버리고 역사를 진보시키는 것, 욕을 얻어먹더라도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민자당-신한국당 국회의원을 거쳐 한나라당 부총재를 맡기도 했던 이우재는 당내 개혁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끝에 2003년 7월 한나라당을 떠났다. 이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을 지냈고 2005년 이후로는 한국 마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올 4월 임기를 마치면 맨 처음 먹었던 마음 그대로 고향 예산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10대 때 뜨겁게 품었던 ‘농촌을 부흥하자’는 생각이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는 것이다.
기사입력 : 2008-04-21 12:12:45
최종편집 : 2008-04-28 16:40:47
최종편집 : 2008-04-28 16: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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