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카라는 어떻게 쿠르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가?
2007년 12월 18일 터키군은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의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이라크 영토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앙카라에 대한 진짜 도전은 케말주의 단일정부가 임박한 시점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터키 거주 쿠르드인들의 민족적 요구로부터 오고 있다. 또한 PKK와의 관계를 의심받고 있는 반대파들은 정치적 탄압과 차별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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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삼십년 가까운 세월로 인해 초췌한 얼굴에 희끗해진 머리칼로 오십의 나이에 디야르바키르에 있는 작은 자신의 상점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아와트 *** 씨(氏). 보잘 것이라곤 없는 그의 가게 어느 한 구석에서도 아타투르크의 초상이나 터키국기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다. 2006년에 자유의 몸이 되어 쿠르디스탄의 역사적 수도로 돌아와 살고 있는 그의 조국을 위한 투쟁은 대학시절인 197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1) 우리들이 이라크 북쪽의 산악지역에 있는 PKK의 비밀 진지를 방문했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경계심은 풀리는 듯 했다.2) 그러나 대화를 허락한 다른 모든 이들처럼 익명을 요구했다. “우리는 가자지구나 시조르다니의 팔레스타인인들처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점령군대와 경찰과의 끊임없는 마찰을 겪으며 이곳에 살고 있다. 이라크 국경지역에 가서 우리 마을들과 도시들을 지나가 보라. 과연 터키가 민주국가가 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가르니존’, ‘얀다르마 코만도’, ‘폴리스’:터키 공권력을 상징하는 표지가 쿠르드 지역 북쪽에 위치한 반에 이르는 길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이라크에 망명한 PKK 전사들과의 긴장상황 때문에 터키의 남동쪽에 주둔한 병력의 수는 수 십 만 명에 이르며 십 만 명 이상이 국경을 따라 진을 치고 있다. 2007년 2월에 투입된 치안 병력은 7월의 선거를 맞아 민족주의적 경쟁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것은 군부에서 의도했던 바였다. 총선에서의 승리 직후 집권 정의개발당(AKP)의 지도자들의 행보는 비틀거렸다. 쿠르드 문제에 관하여 의도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열린' 태도를 보이는 듯하던 레세프 타이프 총리는 2007년 재빨리 바그다드와 협정을 체결한다. PKK의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Vatan Bolunmez!(분단된 수 없는 조국)이라는 희게 칠해진 흙으로 된 얀다르마 코만도의 거대한 구호가 언덕의 사면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는 데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만 한 것이었다. 동방 아나톨리의 중심이 되는 쿠르드 지역인 이곳 반 근처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 군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는 경고의 메시지와도 같은 것이다:'터키에서는 절대로 쿠르디스탄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합법적인 친(親)쿠르드 정치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당(DTP)의 사무소에서 쿠바르 ***씨(氏)는 여전히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 "2004년에 이 지역에서 우리가 꽤 많은 시장을 배출했으며 분명한 위법조작에도 불구하고 현재 터키에서 20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AKP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의 판결을 존중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20명의 의원으로도 2007년 7월의 선거에서 DTP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었던 것이다.
물론 독립적 출마자3)들은 선거에서 선출되기 위해 많은 장애를 넘어야 했다. 예를 들면 새로운 법에 따라 각각의 투표장에는 모든 출마자의 기나 긴 목록이 게시되어야 했다. "우리는 쿠르드인 투표자들을 위해 종이나 나무로 만든 자를 수도 없이 많이 나누어 주어야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글을 읽을 줄 모르므로 우리 측 출마자가 명단의 어디쯤 위치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쿠바르씨는 말했다. 그러나 DTP의 상대적인 패배는 다른 식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20년에 걸친 게릴라전으로 인한 빈곤과 경찰의 고문에 지쳐있었다."라고 지역의 한 교수는 말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쿠르드 유권자들이 이슬람이 주도하는 지역 사회정책의 복지 후생(AKP가 점령한 곳에서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와 식량배급, 지원금에 대한 약속 등)을 택한 것이 사실이다."
더 남쪽의 이란 국경 쪽으로 유크세코바를 향해 가다보면 군의 존재가 더욱 눈에 띈다. 막사와 장갑차, 그리고 검문:쿠르드의 청사가 있는 시가지는 마치 시가전을 치르는 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DTP의 중앙 사무실 건물은 두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으며 이층에는 노랑과 빨강으로 된 당의 깃발로 뒤덮인 방 안에 삼십 명 정도의 인원이 대기하고 있다. 전 날에는 PKK의 멤버인 18세의 젊은 쿠르드 여성 페리한이 터키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열다섯 대에 달하는 차량으로 된 장례행렬이 '순교자'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고자 출발한 준비를 하고 있다. DTP출신의 시장인 유크세코바씨(氏)가 우리 일행에게 함께 할 것을 권유한다.
시에서 10여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은 곳곳에서 찾아온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젊은이와 노인 할 것 없이 계속 이어지는 수많은 인파가 조문객을 맞는 정원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탁자 위에는 꽃다발들로 뒤덮인 페리한의 초상이 놓여있다. 뒤 쪽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이 사원의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들 앞으로 놓인 백여 개의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이따금 씩 마을의 사제들이 기도를 청하곤 하였다. 이윽고 일디즈씨(氏)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쿠르드의 모든 전사들은 나름대로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해 돌아서서 "여기 페리한 역시도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PKK의 이름을 따로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쿠르드족을 억압하고 있는 AKP를 공공연히 비난하였다:"이슬람의 위대한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는 이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에 조차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페리한의 죽음은 2006년 10월의 정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터키 군과 PKK 전사들 간의 교전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PKK에 의하면 쿠르드의 지도자들은 이 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 번도 합의된 사항을 어기고자 한 적이 없다. "케말주의측 언론, 티브이나 신문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충돌을 일으키고자 한 것은 바로 터키 군 이었다"고 유크세코바의 한 젊은이는 화난 듯 내뱉었다. "추적당하여 숨어 다니기만 하는 PKK 병사들은 공격이 있을 때에만 반격할 뿐인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PKK의 실제적인 위협에 비교하여 터키군과 언론의 호전적인 태도가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우선 그들의 군사력이 막강했던 게릴라 시절(1984 - 1992)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92년에 2만 명에 달했던 병력은 삼천으로 줄었고 이라크북쪽에 삼천 오백이 더 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PKK 지도자들의 요구가 15년 전부터 약화되고만 있는 실정이다.
1992년에 터키 정부는 쿠르드 마을들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후 몇 년 간 이러한 공포정치의 결과로 많은 수의 쿠르드 인이 하는 수 없이 대도시로 이주하거나
유럽으로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이민하게 되었다.4) 이런 정부의 전략은 PKK를 쿠르디스탄 북쪽의 군사기지와 격리시킴으로써 그들의 세력 약화를 노린 것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몇몇 지도자들이 완고한 분리주의를 포기하고 타협을 통한 현실적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목표는 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9년 2월, 당수인 압둘라 오칼란이 체포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협상의 기회가 되었다. 터키의 감옥에서 그는 '무장투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였고 쿠르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촉구했다. 그로부터 삼년 후 PKK는 명칭을 바꾸게 된다.5)
이라크 국경지역에서 수 킬로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셈딘리 마을에서 이러한 변신을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민중민주당(Hadep)이, 그리고 5년 후 DTP가 시장을 배출했음에도 친(親)쿠르드 정당들이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6) 4만 5천 명의 주민에 만 5천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대의 존재는 참을성의 한계를 초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처럼 압박이 심한 마을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시장인 후르시트 테킨은 "나의 선임자는 거의 16개월 동안이나 업무를 보지 못했었고 나 역시 30개의 소송이 밀려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정부는 우리를 또 어떻게 대하는가. AKP가 통치하는 지역과는 달리 셈딘리는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라고 털어 놓는다.
유크세코바 남서쪽의 부속 지역인 하카리에서도 험악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을의 입구에서부터 두 명의 사복 경찰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우리의 안내자가 20세에서 30세 되는 젊은이 열 명 정도가 모여 있는 카페의 한 밀실로 인도하였다. 그들 중 PKK의 병사라고는 없었지만 모두 DTP의 지지자를 자처하였다. "불법 신분으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학생인 아프란의 말이다. "DTP가 선택한 합법적인 방식이 옳다고 생각한다. 선거는 어쨌든 쿠르드인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가." 그 오른 쪽의 25살 된 메틴이 듣다못해 말하길, "DTP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역시 언제고 불법의 신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의 친 쿠르드 당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PKK와 같은 무장단체가 있어야만 터키 정부와 전 세계 국가들로 하여금 쿠르드인의 요구를 듣도록 할 수 있다."
4백 킬로 정도 떨어진 산리우르파는 쿠르드 지역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하카리와 시르나크 사이에서 우리는 여러 번 '마을의 수호자들'을 마주쳤는데 이들은 터키 정부에 고용되어 예비군 역할을 하는 쿠르드인들이다. 도중에 검문검색은 점점 철저해져 간다. 매번 우리의 자동차는 꼼꼼하게 수색되었고 가방이 파헤쳐졌다. 한 장교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진과 메모들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한 번 거절하면 한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되었다. 상관에게 보고 한 후에야 우리를 놓아주었다. 십 오 분이 못 지나서 같은 상황의 반복. 산리우르파에 도달할 때까지는 열 세 시간 동안 열다섯 번의 검문을 필요로 했다.
- 첫 번째 그림
<1990년대 초의 쿠르드 분쟁>
게릴라의 주요 행보
쿠르드족의 이주방향
무장 충돌
피난 도시
특별 관리구역
많은 수의 마을이 파괴되거나 철수한 지역
- 두 번째 그림
쿠르드 족의 언어
쿠만치
북
남(혹은 소라니)
팔라와니
디밀리(혹은 자자이)
고라니(라키와 휴라미 포함)
복합지역
조르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쿠르드 족은 시릴 알파벳을 사용한다.
터키에서는 라틴 알파벳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서는 아랍 혹은 아랍-페르시아 알파벳
거의 모든 쿠르드인은 이슬람 수니파 교도들이다.
자료:파리 쿠르드 인스티튜트, 메라드 R 이자디,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각주)-----------------
1978년에 공식적으로 창설된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은 1970년대 중반부터 터키를 뒤흔들었던 학생 저항운동으로부터 유래하였다.
< 쿠르디스탄의 지하은닉처에서>를 읽을 것, Le Monde Diplomatique, 2007년 11월호
터키에서 한 정당을 통하여 출마하기 위해서는 그 당이 전국 유권자의 10%이상을 대표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DTP의 출마자들은 '독립적'인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서야만 했다.
베르나르 도랑 <쿠르드인, 영웅적 운명과 비극적 운명>, Ligne de rep?res, 파리, 2005
2002년에 PKK는 쿠르디스탄의 자유와 민주를 위한 의회(Kadek)로 변신한다. 미셀 베리에의 <전투전의 쿠르드 풍경>참조, Le Monde Diplomatique, 2002년 10월
1994년에 창설된 친 쿠르드당인 Hadep은 터키정부에 의해 2003년에 불법화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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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삼십년 가까운 세월로 인해 초췌한 얼굴에 희끗해진 머리칼로 오십의 나이에 디야르바키르에 있는 작은 자신의 상점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아와트 *** 씨(氏). 보잘 것이라곤 없는 그의 가게 어느 한 구석에서도 아타투르크의 초상이나 터키국기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다. 2006년에 자유의 몸이 되어 쿠르디스탄의 역사적 수도로 돌아와 살고 있는 그의 조국을 위한 투쟁은 대학시절인 197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1) 우리들이 이라크 북쪽의 산악지역에 있는 PKK의 비밀 진지를 방문했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경계심은 풀리는 듯 했다.2) 그러나 대화를 허락한 다른 모든 이들처럼 익명을 요구했다. “우리는 가자지구나 시조르다니의 팔레스타인인들처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점령군대와 경찰과의 끊임없는 마찰을 겪으며 이곳에 살고 있다. 이라크 국경지역에 가서 우리 마을들과 도시들을 지나가 보라. 과연 터키가 민주국가가 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가르니존’, ‘얀다르마 코만도’, ‘폴리스’:터키 공권력을 상징하는 표지가 쿠르드 지역 북쪽에 위치한 반에 이르는 길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이라크에 망명한 PKK 전사들과의 긴장상황 때문에 터키의 남동쪽에 주둔한 병력의 수는 수 십 만 명에 이르며 십 만 명 이상이 국경을 따라 진을 치고 있다. 2007년 2월에 투입된 치안 병력은 7월의 선거를 맞아 민족주의적 경쟁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것은 군부에서 의도했던 바였다. 총선에서의 승리 직후 집권 정의개발당(AKP)의 지도자들의 행보는 비틀거렸다. 쿠르드 문제에 관하여 의도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열린' 태도를 보이는 듯하던 레세프 타이프 총리는 2007년 재빨리 바그다드와 협정을 체결한다. PKK의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Vatan Bolunmez!(분단된 수 없는 조국)이라는 희게 칠해진 흙으로 된 얀다르마 코만도의 거대한 구호가 언덕의 사면을 따라 모습을 드러내는 데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만 한 것이었다. 동방 아나톨리의 중심이 되는 쿠르드 지역인 이곳 반 근처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 군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는 경고의 메시지와도 같은 것이다:'터키에서는 절대로 쿠르디스탄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합법적인 친(親)쿠르드 정치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당(DTP)의 사무소에서 쿠바르 ***씨(氏)는 여전히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 "2004년에 이 지역에서 우리가 꽤 많은 시장을 배출했으며 분명한 위법조작에도 불구하고 현재 터키에서 20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AKP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의 판결을 존중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20명의 의원으로도 2007년 7월의 선거에서 DTP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었던 것이다.
물론 독립적 출마자3)들은 선거에서 선출되기 위해 많은 장애를 넘어야 했다. 예를 들면 새로운 법에 따라 각각의 투표장에는 모든 출마자의 기나 긴 목록이 게시되어야 했다. "우리는 쿠르드인 투표자들을 위해 종이나 나무로 만든 자를 수도 없이 많이 나누어 주어야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글을 읽을 줄 모르므로 우리 측 출마자가 명단의 어디쯤 위치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쿠바르씨는 말했다. 그러나 DTP의 상대적인 패배는 다른 식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20년에 걸친 게릴라전으로 인한 빈곤과 경찰의 고문에 지쳐있었다."라고 지역의 한 교수는 말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쿠르드 유권자들이 이슬람이 주도하는 지역 사회정책의 복지 후생(AKP가 점령한 곳에서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와 식량배급, 지원금에 대한 약속 등)을 택한 것이 사실이다."
더 남쪽의 이란 국경 쪽으로 유크세코바를 향해 가다보면 군의 존재가 더욱 눈에 띈다. 막사와 장갑차, 그리고 검문:쿠르드의 청사가 있는 시가지는 마치 시가전을 치르는 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DTP의 중앙 사무실 건물은 두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으며 이층에는 노랑과 빨강으로 된 당의 깃발로 뒤덮인 방 안에 삼십 명 정도의 인원이 대기하고 있다. 전 날에는 PKK의 멤버인 18세의 젊은 쿠르드 여성 페리한이 터키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열다섯 대에 달하는 차량으로 된 장례행렬이 '순교자'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고자 출발한 준비를 하고 있다. DTP출신의 시장인 유크세코바씨(氏)가 우리 일행에게 함께 할 것을 권유한다.
시에서 10여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은 곳곳에서 찾아온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젊은이와 노인 할 것 없이 계속 이어지는 수많은 인파가 조문객을 맞는 정원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탁자 위에는 꽃다발들로 뒤덮인 페리한의 초상이 놓여있다. 뒤 쪽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이 사원의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그들 앞으로 놓인 백여 개의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이따금 씩 마을의 사제들이 기도를 청하곤 하였다. 이윽고 일디즈씨(氏)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쿠르드의 모든 전사들은 나름대로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해 돌아서서 "여기 페리한 역시도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PKK의 이름을 따로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쿠르드족을 억압하고 있는 AKP를 공공연히 비난하였다:"이슬람의 위대한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는 이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에 조차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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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스 살라자르 아레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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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페리한의 죽음은 2006년 10월의 정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터키 군과 PKK 전사들 간의 교전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PKK에 의하면 쿠르드의 지도자들은 이 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 번도 합의된 사항을 어기고자 한 적이 없다. "케말주의측 언론, 티브이나 신문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충돌을 일으키고자 한 것은 바로 터키 군 이었다"고 유크세코바의 한 젊은이는 화난 듯 내뱉었다. "추적당하여 숨어 다니기만 하는 PKK 병사들은 공격이 있을 때에만 반격할 뿐인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PKK의 실제적인 위협에 비교하여 터키군과 언론의 호전적인 태도가 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우선 그들의 군사력이 막강했던 게릴라 시절(1984 - 1992)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92년에 2만 명에 달했던 병력은 삼천으로 줄었고 이라크북쪽에 삼천 오백이 더 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는 PKK 지도자들의 요구가 15년 전부터 약화되고만 있는 실정이다.
1992년에 터키 정부는 쿠르드 마을들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후 몇 년 간 이러한 공포정치의 결과로 많은 수의 쿠르드 인이 하는 수 없이 대도시로 이주하거나
유럽으로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이민하게 되었다.4) 이런 정부의 전략은 PKK를 쿠르디스탄 북쪽의 군사기지와 격리시킴으로써 그들의 세력 약화를 노린 것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몇몇 지도자들이 완고한 분리주의를 포기하고 타협을 통한 현실적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목표는 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9년 2월, 당수인 압둘라 오칼란이 체포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협상의 기회가 되었다. 터키의 감옥에서 그는 '무장투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였고 쿠르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촉구했다. 그로부터 삼년 후 PKK는 명칭을 바꾸게 된다.5)
이라크 국경지역에서 수 킬로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셈딘리 마을에서 이러한 변신을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민중민주당(Hadep)이, 그리고 5년 후 DTP가 시장을 배출했음에도 친(親)쿠르드 정당들이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6) 4만 5천 명의 주민에 만 5천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대의 존재는 참을성의 한계를 초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처럼 압박이 심한 마을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시장인 후르시트 테킨은 "나의 선임자는 거의 16개월 동안이나 업무를 보지 못했었고 나 역시 30개의 소송이 밀려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정부는 우리를 또 어떻게 대하는가. AKP가 통치하는 지역과는 달리 셈딘리는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라고 털어 놓는다.
유크세코바 남서쪽의 부속 지역인 하카리에서도 험악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을의 입구에서부터 두 명의 사복 경찰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우리의 안내자가 20세에서 30세 되는 젊은이 열 명 정도가 모여 있는 카페의 한 밀실로 인도하였다. 그들 중 PKK의 병사라고는 없었지만 모두 DTP의 지지자를 자처하였다. "불법 신분으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학생인 아프란의 말이다. "DTP가 선택한 합법적인 방식이 옳다고 생각한다. 선거는 어쨌든 쿠르드인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가." 그 오른 쪽의 25살 된 메틴이 듣다못해 말하길, "DTP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역시 언제고 불법의 신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의 친 쿠르드 당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PKK와 같은 무장단체가 있어야만 터키 정부와 전 세계 국가들로 하여금 쿠르드인의 요구를 듣도록 할 수 있다."
4백 킬로 정도 떨어진 산리우르파는 쿠르드 지역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하카리와 시르나크 사이에서 우리는 여러 번 '마을의 수호자들'을 마주쳤는데 이들은 터키 정부에 고용되어 예비군 역할을 하는 쿠르드인들이다. 도중에 검문검색은 점점 철저해져 간다. 매번 우리의 자동차는 꼼꼼하게 수색되었고 가방이 파헤쳐졌다. 한 장교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진과 메모들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한 번 거절하면 한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되었다. 상관에게 보고 한 후에야 우리를 놓아주었다. 십 오 분이 못 지나서 같은 상황의 반복. 산리우르파에 도달할 때까지는 열 세 시간 동안 열다섯 번의 검문을 필요로 했다.
- 첫 번째 그림
<1990년대 초의 쿠르드 분쟁>
게릴라의 주요 행보
쿠르드족의 이주방향
무장 충돌
피난 도시
특별 관리구역
많은 수의 마을이 파괴되거나 철수한 지역
- 두 번째 그림
쿠르드 족의 언어
쿠만치
북
남(혹은 소라니)
팔라와니
디밀리(혹은 자자이)
고라니(라키와 휴라미 포함)
복합지역
조르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쿠르드 족은 시릴 알파벳을 사용한다.
터키에서는 라틴 알파벳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서는 아랍 혹은 아랍-페르시아 알파벳
거의 모든 쿠르드인은 이슬람 수니파 교도들이다.
자료:파리 쿠르드 인스티튜트, 메라드 R 이자디,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각주)-----------------
1978년에 공식적으로 창설된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은 1970년대 중반부터 터키를 뒤흔들었던 학생 저항운동으로부터 유래하였다.
< 쿠르디스탄의 지하은닉처에서>를 읽을 것, Le Monde Diplomatique, 2007년 11월호
터키에서 한 정당을 통하여 출마하기 위해서는 그 당이 전국 유권자의 10%이상을 대표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DTP의 출마자들은 '독립적'인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서야만 했다.
베르나르 도랑 <쿠르드인, 영웅적 운명과 비극적 운명>, Ligne de rep?res, 파리, 2005
2002년에 PKK는 쿠르디스탄의 자유와 민주를 위한 의회(Kadek)로 변신한다. 미셀 베리에의 <전투전의 쿠르드 풍경>참조, Le Monde Diplomatique, 2002년 10월
1994년에 창설된 친 쿠르드당인 Hadep은 터키정부에 의해 2003년에 불법화되었다.
각주)-----------------
-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 기사입력: 2008-03-19 19:13:34
- 최종편집: 2008-03-21 11: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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