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 자본론

아랭 비르 Alain Bihr 프랑슈콩테 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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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신(新)고전 경제학자들1)과 친밀한 서클에서 거론된 “인간자본”의 개념은 인간자원의 이론가들과 직업소개소들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개념화를 해서 1980년대부터 확산되었다. 이 개념은 최근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보여주었듯, 정치담당자들의 사용언어로 선택되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과거 사회당 정부의 부정적 국가경영 결산서를 평가하면서 2006년11월9일 셍테티엔의 대중집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만일 국가가 방법론을 초월해 운용된다면, 프랑스는 자원(資源)의 하위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프랑스는 실업, 두뇌의 해외유출과 노동시간 주35시간제로 ‘인간자본’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당의 대선경쟁자 세골랜 루아얄은 이렇게 응수했다:“그들은 (우파사람들) 사회의 근본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경제성장의 재가동(再稼動)은 사회정의가 적(敵)이 아니라 효율성의 원동력을, 인간자본에 대한 다양한 대중적 조정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높이게 하는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상정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것이야말로 제일 지속 가능한 우리의 경쟁에서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2)

사실상 인간자본이란 말은 신자유주의의 연설인 현대적 귀족(貴族) 언어로 강요된 괴이한 모순어법(矛盾語法)을 구성한다. 수십억 인간이 빈곤과 실업에 방황하는 사이에 살아있는 노동을 항구적으로 착취함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본, 냉혹한 괴물, 그리고 죽음의 노동 축적이, 마치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강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표현을 감히 쓰는 경제인, 기업인, 정치인과 또한 역시 일반인조차도 단지 중요한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모든 인간존재를 재단하고 상품가치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세계화의 개념은 완전히 비(非)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자본에서 무엇을 듣는가? 단순히 임금노동의 힘이다:임금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 내다 팔려고 내놓는 체력의 총체(강함, 인내심, 재주, 노하우), 윤리(용기, 끈기, 윤리의식과 직업의식), 지성(일반지식과 전문지식, 상상력과 총명함), 미의식(취미, 지혜), 이성(감성능력, 관계의 의미 또는 협상의 의미). 노동의 힘을 인간자본으로 지정하는 것은 이렇게 하여 임금노동자들을 설득하고 설득되게 만든다. 그들 각자는 노동의 힘과 함께 인간자원의 총체인 하나의 자본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건강과 문화활동, 여가선용, 개인적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직업경험, 즉 그의 경력과 처음부터 지속되는 교육에 의해 유지되고 증대되는 지식의 보유와 그 결실을 자기소유로 만든다.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각자는 자본주의적 기업을 따라 금융축적의 잠재적 센터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각자는 자본이란 것이 그자신의 개성이라고 하면서 자본가로서 행동하게 된다.

시니즘(Cynisme-견유주의(犬儒主義))와 무의식으로 가보자. 불안정과 실업, 더 나아가 사회경제적 배제(排除)로 인해 전락한 날마다 수자가 불어나는 모든 노동력에 관한 자본(그래서 가치부여 가능성과 부자(富者)되기)에 대한 담론이 있다. 이유는 단순히 그들은 자본으로 이익을 낳게 하는 상품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팔 수 없기 때문이다. 북부와 남부세계도 모두 신자유주의 발전의 결과로 계속 증대되는 처절한 임금수준에 저항하는 노동력을 교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형식을 적용할 때, 시니즘은 덜 파렴치하고 무의식은 덜 바보스럽다.
이러한 시니즘과 무의식으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려고 한다. 만일 그들이 실업이나 고용불안의 “작은 배-갤리선”에 타게 된다면, 의지할 곳은 그 자신뿐이다:그들은 팔아먹을 것이 없거나 있더라도 정당한 값으로 팔 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상징적인 물질자원, 사회문화적 자원의 불평등한 횡령착복 또는 불평등 분배를 주도하는 모든 사회구조들이 동시에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구조는 서민지역 출신 청년들의 인간자본이 부유층 출신 청년의 인간자본과 균등하게 평가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적으로 더욱이 심리적으로, 인간자본의 개념은 민중의 형식을 응축시킨 그자체로서 세계화의 주의설(主意說) 속에 충당된 다소간 강력한 결정론과 모든 사회관계를 해체하게 만든다:“가능성을 위해서는 욕구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안정적 직업을 갖고 있는 임금노동자에 관해서는, 동일형식상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인간자본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게 된다. 이 사실은 전자와의 협동을 파기할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자기 값을 더 잘 돋보이게 하기 위한 모든 절차의 자원축적에 대한 항구적 기업과, 모든 규모의 노동외적 존재로 변모함으로서, 너무나 확실한 자본을 보유하고 증대하기 위해 언제나 그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계속 설득하게 한다.

막스 노이만
ⓒ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그러나 만일 각자가 군소기업인이라면, 그 때는 동시에 엄폐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 메커니즘 그 자체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자본의 경영자로서 임금노동자는 자본에 노동의 힘을 파는 것으로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현실화는(일정 기간의, 강도 높은, 전문성이 있고 결정적으로 한정된 생산의 노동형태로 실현되는) 후자에 의한 구매가격의 값이 저렴한 것보다 더 많은 값어치의 자본을 공급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이러한 잉여가치, 즉 자체가격보다 더 많은 가격을 형성할 수 있다. 임금은 일종의 적정가격, 즉 정확한 통화가치의 대가가 되는 “서비스”의 판매로 간주된다. 자본과 임금노동자 사이에 착취가능성은 없다:바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광범위한 “시장권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드디어 단순 상품에 대한 자본의(노동력) 설명을 추가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가 이미 이 용어를 사용한 의미로서 확고한 물신숭배(物神崇拜)를 실행하는 것이다. 자본이 “하나의 재판중인 가격”이고, 교대로 상품의 형태를 취하면서 계속되는 이동순환 재판 과정에서 보존되고 증대될 수 있는 하나의 가치라는 명분으로, 모든 상품(노동력처럼) 또는 모든 통화가치의 금액은 그 자체로 자본이 되는 것이다.
다만 자본의 반환조건들을 사람들이 드디어 엄폐해 버린다:임금형태로 노동력을 착취, 노동력을 상품으로 변모하기, 노동자들의 수용, 노동자생산의 사회적 수단의 박탈 등, 이것들은 그들의 착취가 바로 축적한 결실이 된다. 발생원칙과 동시에 자본 그 자체에 대항하는 자본을 운위하는 것. 그것은 모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서 전복(顚覆)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세계의 조류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아랭 비르 | 번역·주섭일 본지 상임고문

1) 우리는 1950년대에 “인간자본”이 개념을 발명한 미국 경제학자 테오도르 위리엄 슐츠에게 공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인간자본”은 시카고학파의 대표들 가운데 한 명인 게리 스텐리 베커와 그의 대학에 의해 유명해졌다.
2) “프랑스인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 누벨옵스, 2007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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