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점쳐지는 총선에서의 승리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왜 그토록 인기가 있나

장 라드바니(Jean Radva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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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 90주기를 맞아 서구에서 일었던 반공의 물결은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할 정도이다. 이러한 과거의 공격이 이제 오늘날의 러시아 체제에도 이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수상쩍은 민주주의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12월 2일의 총선에서의 승리가 의심할 바 없이 다시 확인시켜 줄 그의 인기를 미디어의 조작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유권자들이 그의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이다.

2007년 12월의 러시아 총선에서 예상외의 결과는 나오지 않을 전망이다. 여론조사에 따라 이미 의석의 다수를 획득할 것으로 보이는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은 블라디미르 푸틴 자신이 의원 명단을 작성할 것이라는 보도 이후 지지율이 크게 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현 대통령이 국정을 실제 지휘하는 것을 그만둔다 할지라도 차기 대통령에게 하원에서의 ‘의석다수’(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삼분의 이 이상의 의석)를 물려주게 될 것이라는 추측은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지난 8년간 자국을 통치해 온 지도자에 대한 러시아 여론의 이러한 광범위한 지지는 서구에서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우선 러시아인들은 거의 유전적으로 강력하고 권위적인 지도를 필요로 하여 결국 민주주의로 나아갈수 없다는 낡은 이론이 다시 등장하였다. 다른 이들은 현 정권이 강제적인 권력체계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행사함으로써 옐친시대에 얻어진 취약하고 모순적인 발전을 후퇴시키고 있는 것으로 반대파의 미약함을 설명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이 듣기 좋은 완곡어법으로 부르는 ‘계획적 민주주의’의 기능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최근의 변화를 특징짓는 다른 근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이해 없이는 푸틴대통령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현재의 지지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푸틴이 1999년 말 우선 총리로서 그리고 2000년 3월 대통령이 됨으로서 권좌에 올랐을 때 러시아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보리스 옐친이 시도한 혼돈스런 개혁은 절대 권력의 총체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를 약화시켰다:많은 지방과 공화국이 각각 다른 법규를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중요한 점에서 중앙정부의 헌법과 모순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역의 통치자들이 세무서나 세관, 내무부 같은 주요 행정조직의 책임자들을 임명하는 권한을 독식하는 경우가 많아 족벌주의와 부패를 부채질 했다.

드미트리 브루벨&빅토리아 티모페예바
ⓒ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붕괴의 위기감

이와 동시에 정부는 천연자원으로 벌어들이는 정기적인 이익과 같은 국가의 주요 수입원에 행사하던 권한에 대한 저항에 맞부딪히게 되었다. 옐친 시절에 불투명한 민영화의 일환으로 설립된 대기업들이 역외 회사에의 자산의 양도나 이익금 횡령을 위한 돈세탁과정을 다중화 하는 등 합법, 불법의 행태를 통해 거액의 세금을 피함으로써 정부로 하여금 재정적 여유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Ioukos 같은 사기업이건 Gazprom 같은 민영화된 공기업이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중앙정부의 기능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정말로 산산조각이 나지 않으면, 적어도 다시 도약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국가 붕괴의 위기감은 특수한 국제정세와 맞물려 매우 넓게 퍼져갔다:미국과 대서양 동맹국들은 모스크바의 전통적 영향력을 최소화하고자 전례 없는 공세를 펼쳤다. 오래전에 몇몇 미국의 조언자들1)에 의해 이론화 된 이 전략은 노골적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억압한다는 ─ 소위 Roll Back이라 불리는 ─ 내용이었다. 그것은 크렘린의 체첸정책의 끔찍한 결과와 그럼에도 계속되는 이웃국가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인 면에서의 거북한 개입 등에서 정당화의 이유를 찾는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화시키는데 주력하는데 혹자는 그것을 일종의 러시아 혐오증(russophobie)2)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러시아 수반이 보여 준 호의적인 제스처에 긍정적으로 화답하기는 커녕, 미국은 그것을 약화된 세력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유색의 혁명’이 일어난 조르지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민감한 지역에 개입하고자 했다. 외교적, 군사적으로 증대되는 그러한 개입뿐 아니라 미국인들은 교회와 사이비종교단체에서부터 각 지역의 비정부조직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지역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유럽의회의 프로그램을 포함한 여러 국제기구의 기금으로 그러한 조직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게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생독립국들로 하여금 거북한 이웃나라로부터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자체는 분명히 정당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유럽의 새로운 정책은 러시아가 동유럽과 카스피해 연안국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당보다도 우위에 있는 러시아의 지도부가, 미국이 유럽과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러시아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자 애쓰고 있다고 여론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몇 가지 천연자원을 공급하는 평범한 나라로 러시아의 역할이 축소될 것이며 거기서 나오는 이익마저도 서양의 거대 기업들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혼돈에 대한 불안감은 권력을 집중시킬 필요를 느낀 크렘린측근에 의해 의도적으로 과장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부터 시도된 정책과 그것이 러시아 국민에 의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에 있었던 연이은 위기상황과 국제무대에서의 약화된 위상에 상처를 입은 국민의 여론에 깊이 자리한 위기감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국내 상황으로 눈을 돌려보면 새로운 대통령의 정책은 크게 네 가지의 중심축을 가지고 있었다:천연자원으로 얻는 수입의 관리를 재정비하는 동시에3) 러시아 산업을 재건하고, 지역정부에 러시아적 제도를 다시 견고히 다지며 안정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양하고 때로는 투박한 방법들은 냉철한 실용주의와 소득격차문제의 도구화가 혼재된 것이었다. 그것들은 애국적 재건의 수사학에 따른 것이었고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푸틴이 체첸에서의 ‘더러운 전쟁’을 정당화 시킨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상자 기사 참조>

2000년 5월부터 그가 임명하였던 ‘특별감사원’에 의지하여 지방공화국 정부의 수반들의 면책특권을 빼앗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중앙정부의 법과 예산조례를 준수하도록 강요함으로써 크렘린은 지방행정을 통제하는 권력을 회복하게 된다. 2004년부터는 아예 크렘린이 그들의 직위를 추천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정부가 모스크바의 시장인 유리 루코프와 같이 잠재적으로 비판적인 지방 지도자들을, 재임을 약속하는 등의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했으며, 그럼에도 끝까지 저항하는 이들은 사임하게 하거나 소송에 회부하였다.

2000년 7월, 푸틴은 스물 한 명의 지도층 인사들을 크렘린으로 불러 거래를 제안한다.4) 정부가 그들의 과거를 파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 러시아의 재건을 위한 정부의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협조하지 않는 이들은 곧 제거되었으며 그들 중 셋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미하일 체르노이) 일부 언론은 그들 중 다수가 유태계 인사임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Ioukos의 회장인 미하일 코도르코프스키의 체포는 크렘린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석유와 언론재벌인 그를 목표물로 삼은 것은 분명히 상징적이다. 그가 Ioukos의 40%의 주식을 미국기업인 Exxon- Mobil에 팔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자 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직후였다. 결국 코도르코프스키는 사기혐의로 9년형에 처해졌으며 그룹은 해체되었다. 그것은 산업의 재정비의 신호탄이었고 대통령의 권력이 정유 화학 산업에서 원자력, 무기 제조업에서 첨단 기술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략적 분야에서 그 무엇보다 우위에 있음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산업을 전부 국유화로 다시 되돌린다거나 소비에트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불투명한 맥락에서이지만 러시아의 경제는 이미 진짜 자본주의체제가 되어있었다. 정부에게 감시당하는 대기업들이 전략적 산업분야를 주도하고 있으나 ─ 공기업이나 사기업들이 작은 규모에 한해서는 물론 외국의 참여를 인정하고 있기는 하다 ─ 대부분의 기업과 서비스업체들은 사유화되었고 러시아 역사상 유례없이 전 세계에 개방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크렘린이 표방하는 목표는 그러므로 전혀 다른 것이다. 원유가격 상승을 이유로 다국적 서구 기업에 맞설 만한 러시아 그룹들로 좀 더 다양하고 활력 있는 산업을 일으켜보자는 것이다. 유가상승이라는 맥락에서 그러한 정책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2006년에 처음으로 러시아의 국내 석유생산은 1991년 이전의 수준을 되찾았으며 국가의 연간 수입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 점이, 되찾은 제도적 안정과 더불어 푸틴의 인기를 설명하는 열쇠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러시아인들이 성장의 이익을 공유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또한 여론이 권력이 요구하고 있는 모든 희생을 다 감수하는 것도 아니다. 그 증거로 2005년 초, 가장 취약한 계층인 퇴직자와 하급 관리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퇴직제 개혁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정부는 사회정책을 수정해야 했다.

지난 9월 각계의 전문가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크렘린의 주인은 “민주주의와 다수당주의만이 장기적으로 러시아의 실제적인 안정을 보장한다”라고 천명했으며 일례로 진정한 사회민주당의 창당계획을 지지한다고 확언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다수당체제가 확립되려면 수십 년은 걸릴 것이라고 덧붙이고 말았다.5) 유권자의 성숙함에 관한 깊은 불신을 반영하는 이러한 견해를 심지어 반대파를 포함한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같이하고 있다.

집요하게 괴롭히는 경찰
실제에 있어서 푸틴 정권은 최근 몇 년 간 정당이나 이익단체(특히 서구의 영향에 민감하다고 보이는 비정부기구들)의 설립을 더욱 어렵게 하고 득표율 7%를 넘지 못해도 반대파에게 당선의 기회를 주던 선거구제를 없애도록 선거법을 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실천양상을 변화시켰다. 텔레비전 방송사를 손보아 최대 채널인 ORT 조차도 이제는 비판적인 반대파를 아예 토론에서 배제할 정도가 되었고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란 제한된 청취자를 위한 라디오 방송인 Echo Moscou 나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 독자가 급감한 신문에게만 허락되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정부에 비협조적이라고 판단되는 움직임을 억압하고 협박하는 사회분위기였다. 경찰과 ‘Nachi’(크렘린에 의해 조직된 ‘우리의 것’이란 뜻의 젊은이 단체)6) 에게 괴롭힘을 당한 ‘또 다른 러시아’의 시위가 대표적이다. 이 점에서도 역시 러시아 사회는 폭력적이며 기자인 폴리트코브스카야나 유리 체코치킨의 살해에 공식적인 조직이 직접 연루된 것은 아니지만 언론인이나 기업가, 공무원 등 각계각층에서 살인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는 것은 국가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안보조직의 명백한 부패, 행정부와 사법부의 미분화, 스킨헤드족이나 순수혈통주의자등의 극단주의 집단에 대한 관용 따위가 그것이다.7)

러시아인들은 1988년 유일 정당 지배의 폐지와 1991년 소련의 붕괴이후에 시작된 개혁에의 일천한 경험의 역사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어려움들을 고려해 달라고 우리에게 역설한다. 2007년 12월의 총선과 2008년 3월의 대선은 현재의 법제에 따라 치러질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바대로 갖가지 세력들을 대변하는 정치인들 대부분이 푸틴에게 건의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헌법을 고치게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푸틴이 모종의 역할을 차지하긴 했지만 러시아에서 권력이양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진정한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계획적 민주주의’는 편리한 완곡어법일 뿐이다:권력이 특권적 지위에 민감한 반대세력의 대표들을 끌어들이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친족관계를 포함한8) 사적인 관계를 통한 정경유착이 심화되는 중에 저항이 체계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조작된 민주주의’라고 하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른다.

푸틴은 러시아를 안정시키고 국제무대에 명성에 걸 맞는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다수세력의 지지와 강력한 대통령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최근 몇 년 간 수확한 성과에 취한 대다수 국민의 동의로 그가 이 두 가지를 다 얻게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통제 정치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암초는 두 개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되찾은 성장의 대가로 오히려 벌어지는 빈부 격차로 초래된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전체 1/3에 달하는 인구의 빈곤화이다. 이 계층이 물론 높은 수준의 조직으로 표현되지는 않겠으나 2005년 겨울에 우리는 이미 그들이 자신들의 저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지금까지 크렘린은 이동의 자유와 외국과 거래할 수 있는 자유 ─ 모두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지만 그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세계 각국으로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을 보낼 수 있는 자유와 같은 새롭고 소중한 자산을 제한하는 것을 자제해 왔다. 이제 큰 폭으로 개방되어있는 나라에서 애국적인 수사나 정당 및 시민조직의 활동을 제한하는 일, 기업에 대한 관료적 통제 따위는 순식간에 성장 자체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방해물이 충분히 될 수 있다. 또한 점점 더 많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그것들의 실체 ─ 소비에트 체제로부터 물려받은 행정주의적 세계관과 규제방식 ─를 드러내는 일이 될지 모른다. 장 라드바니 | 번역·이두성

1) 예를 들어 Zbigniew Brzezinski 의 y for Eurasia>, Foreign Affai
rs, n。5, New York, 1997
2) Anatol Lieven, , World Policy Journal, n。4, New York, 2000 -2001 겨울호
3) Le Monde diplomatique 2007년 2월호에 게재된 Jean-Marie Chauvier 의 <푸틴의 새로운 러시아 La ‘nouvelle Russie’ de Vladimir Poutine>를 읽어볼 것

4) Le Monde 2000년 7월 31일자 기사 참조
5) 2007년 9월 15일 발다이 클럽에서의 푸틴의 연설
6) <푸틴을 따라 촘촘히 줄 선 젊은이들>, Courrier Internatio nal 2007년 8월 30일자 참조
7) Carine Clement과 Denis Paillard 의 <러시아 사회를 비추는 열 가지 조명> 참조, Le Monde Diplomatique 2005년 11월호
8) <권력의 부모들>, Kommer sant Vlast,, 2007년 9월 24일자

  • 국제관계의 비중

  • 2000년 3월 블라디미르 푸틴이 처음 대통령이 되었을 때부터 그가 전략의 전환을 위해 근본적으로 시도한 것은 외교 분야의 정책이었다. 그 이유는 일반 대중의 여론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지도자들은 국제무대에서의 자국의 위상에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소련의 해체에 따른 급격한 변화는 불안의 요소들을 배가시켜왔다:영토의 갑작스런 축소, 오래 전부터 ‘러시아들’로 간주해왔던 지방들의 이탈, 가까운 이웃국가로서의 러시아들(구소련의 공화국들)의 불확실한 지위들이 그것이다. 그 국가들에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부모나 친지를 두고 있는 상황이며 그 지역으로부터 러시아로의 대거 이주가 목격되고 있다.

    이런 내부적 상황에 잃어버린 영향력과 관련한 고통스런 경험이 덧붙여져 국가주의적인 감정에 기반한 여론이 조성되기 알맞은 풍토가 형성되었으며 푸틴정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당들이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였다. 최근에 있었던 제도개혁이나 경제적 사회적 변혁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큰 결정들이 애국적 수사의 일환이었으며 조국 러시아에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 당연히 맡아야 할 역할과 능력을 되찾게 한다는 명목이었다.

    국제관계속의 러시아의 정책적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결정적 요소는, 행정부를 초월하여 정치계급 내부에 널리 퍼져있는 집단적인 심리, 즉 서구국가들에게 농락당한 것만 같은 기분일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사건 직후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워싱턴과의 눈부신 교감의 이유가 완전히 보답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아니다. 크렘린은 내부의 경제적인 상황을 추스릴 시간적 여유를 버는 동시에 전 세계적인 테러의 위협과 체첸의 저항을 연관 짓는 계기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엘리트들의 신중한 반응을 불렀던 푸틴 대통령의 행보는 대서양 동맹국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낼 법도 했었다. 그런데 미국은 그러한 제스처를 러시아의 지속적인 세력약화로 풀이하고는 모든 방면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을 억압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코카서스의 우크라이나에서부터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얽혀있는 지역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모스크바는 근린국가들과의 관계를 우아하게 재정립하는데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불법적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거칠었던 결정들(천연가스의 가격을 세계시장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던가), 그리고 무능력한 대응 (2004년 우크라이나 선거 운동 때의 경우)은 반대자들에게 논란을 일으킬 구실을 제공한 무거운 짐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유색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예를 들어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무능력한 대응의 결과를 밝혀낼 수 있을까?1)

    이라크나 최근의 분쟁지역에서의 서방 국가들의 군사행동과 관련한 돌발 사고들과 인권문제가 점점 커지게 되었고 러시아는 점점 그들의 입장에서 불공평하게 보이는 늘어나는 행위들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2월에 뮌헨에서의 연설2)에서 있었던 러시아 대통령의 경고는 이 모든 문제를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서구 언론에서 거칠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폐쇄적인 주장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모든 민감한 사안에 관한 논의를 재개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대상은 조르지아와 같은 구소련 국가들로의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개방, 미사일 방어선 구축, 코소보사태 및 이란 핵문제 등 전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러한 논의는 크렘린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확인해 주었다. 1990년대에 러시아를 서구의 열등한 동반자의 지위로 끌어내린 정치적 역학모델은 폐기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모스크바는 유럽 에너지 조약과 같이 이제 더 이상 불공평한 것으로 여겨지는 합의 따위에 끌려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거침없는 정치적 담론은 선거용이라는 측면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지형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유럽과 미국은 소위 ‘BRIC’(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의 부상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가 단순히 유럽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상하이 그룹3)에서의 북경과의 동반자관계를 필두로 러시아의 아시아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할 것이다.

    자신의 조국이 국제무대에서 다시금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야 말로 러시아국민들이 푸틴 대통령을 계속해서 지지하는데 확실하게 기여한 것이다.
장 라드바니 | 번역·이두성

1)Regis Gente와 ,Laurent Rouy의 <자발적 혁명의 그림자 속에서>, 그리고 Vicken Cheterian 의 <동구에서의 눈속임 혁명> 참조, Le Monde Diplomatique, 2005년 1월호과 10월호
2) <일방적 권력집중은 정당성이 없으며 부도덕하다> Le Monde 2007년 2월 13일자
3)상하이 협력기구(OCS)는 ‘상하이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1996년에 창설되어 현재 6개 회원국(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타지키스탄)과 4개 초청국(인도, 이란, 몽고, 파키스탄)이 참여하고 있으며 초청국지위로서의 미국의 참여가 거부된 바 있다.

  • 러시아의 주요 정당

  • 연방 국회 - 러시아 연방 의회 - 는 러시아 연방의 입법부를 대표하는 기관이다. 국가두마(하원 450석)와 연방회의(상원 178석)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운 선거법에 의해 두마의 의원들은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나 매우 제한적인 절차에 따라 공인되어 명단을 구성할 권한이 주어진 정당의 의원들로 국한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공인의 기준에 미달하는 세력들을 공평하게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통합 러시아(ER, 중도 우파):푸틴의 집권당은 2001년 ‘조국 - 전 러시아당’과 ‘통일당’과의 연합에 의해 탄생했다. 두마의 현 의장인 보리스 그리즈로프가 2002년부터 당의 대표를 맡고있다. 1백 5십만 당원을 가진 러시아의 유일한 실제적인 정당으로 엘리트 정치인들을 푸틴에게로 결집함으로써 2003년 12월 총선에서 국가두마의 다수당이 된다.(37.57%의 득표로 450석 중 222석을 차지)

    러시아 연방 공산당(KPRF 구소련 공산당):1993년에 탄생하여 귀에나디 지우가노프가 이끌던 KPRF는 제 1야당이 되었다. 2003년에 이 전보다 11.5%가 하락한 12.61%의 득표로 52석을 얻는데 그쳐 곤경에 처한다. 2007년 5월 앞당겨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옛 스탈린그라드인 볼고그라드의 시장을 당선시킨다.

    러시아 자유 민주당(LDPR, 극우민족주의):두마의 부의장이기도 한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가 지휘하는 LDPR은 1989년 소련 자유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다. 인종차별, 반유태주의, 위대한 러시아에 대한 향수 등을 앞세워 통합 러시아와 공산당에 이어 세 번째 정치세력이 되었다. 2003년에 11.46%로 36석을 획득.

    정의 러시아(중도 좌파):크렘린의 후원으로 2006년에 구성된 당으로 세 개의 정치세력이 합세하였다. 로디나 (조국, 좌익 민족주의 운동 연맹으로 2003년에 9.02%로 37석 차지), 그리고 퇴직자의 당과 삶의 당의 연합. 연방회의 의장인 세르게이 미로노프가 이끌고 있으며 좌익 정권교체세력을 표방한다. 2007년 3월 부분적 지방선거에서 공산당이 15.7%, 통합 러시아가 46%를 얻었을 때 11.6%의 득표를 한다.

    러시아 민주당(labloko라고도 하며 중도세력):자유 개혁 세력인 labloko는 1993년 그리고리 라브린스키, 루리 볼디레프, 블라디미르 루킨이 세웠다. 국가가 계획하는 시장경제와 유럽연합에의 가입을 주창하며 현재는 라브린스키가 주도하고 있다. 2003년에 4.3%의 득표로 4석을 얻는데 그친다.
    우파 연합(SPS):보수당이자 친 서구지향적이고 푸틴에 반대하는 우파 연합은 1999년에 ‘젊은 개혁자들’ 출신(아나톨리 추바이스, 보리스 넴소프, 에고르 가이다르 등)의 다양한 흐름을 세력화하기 위해 1999년 만들어졌다. 2005년에 니키타 벨릭이 대표로 선출되었다. 2003년 선거에 3.97%, 3석으로 대패하여 두마에서 축출되고 2004년 1월 리더인 넴소프는 사임한다.

    또 다른 러시아 - 2006년에 활동을 시작한 상이한 세력들의 연합으로 푸틴을 반대하는 자유쥬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작가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운동과 같은 민족주의자들을 망라한다. 전 세계 체스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가 2008년 대통령후보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총선에서 세 명의 의원 후보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올리비에 삐로네 | 번역·이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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