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실려 가든 죽어나가든, ‘오기’로 가는 겁니다”
[인터뷰] 무기한 단식 선택한 기륭전자분회 강화숙 부분회장
서울디지털산업단지 한 쪽 귀퉁이에 자리한 기륭전자.
지금으로부터 1년 전 50일을 넘기는 공장 점거농성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질 당시 기륭전자는 굳게 닫힌 철문과 철조망, 용역경비의 폭력으로 유명세를 치러야만 했다.
기륭전자가 유명세를 타게끔 만든 장본인은 바로 기륭전자분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문자메세지로 보내진 비인간적 해고통보에 이들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하고 노동자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리도 먼 길을 오게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투쟁이 지난 24일로 1년을 넘겼다.
구로공단에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은 그럴듯하게 포장됐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라 이들은 또 다시 목숨을 건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기륭전자분회 김소연 분회장과 강화숙(37) 부분회장은 지난 24일 투쟁 1주년을 기점으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투쟁 1주년을 기념해 단식농성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은 비단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만 처한 상황은 아니다. 목숨을 걸어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은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돼 버렸다.
“24일부터 6일째에요. 단식으로 몸이 안 좋아져서 얼굴에 약간의 두드러기가 났어요. 1년이 됐죠. 살아보려고 시작한 투쟁이 어느새 1년이 훌쩍 넘은 거에요. 그런데도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죠. 안타깝고 서럽죠...“
기륭전자 앞 천막농성장에서 만난 강화숙 부분회장은 또다시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넋두리를 시작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나서 두 끼는 굶어봤는데 처음 이렇게 해봐요. 견딜만하긴 한데, 모르겠어요. 그래도 끝까지 해야죠. 병원에 실려 가든지, 죽어나가든지. '오기' 하나로 하고 있어요. 누가 이기나 보세요...”
누가 그에게 목숨을 담보로 싸울 수밖에 없을 정도의 오기가 생기게 한 것일까.
전남 화순이 고향인 그는 20대를 서울에서 보냈다.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돼 가족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어머니가 완쾌된 33살 때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2003년, 갓 제대한 남동생과 8살 어린 여동생을 보살펴야 했던 그는 결국 기륭전자에 몸을 실었다. 결혼도 해야 했지만 결혼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올라왔었죠. 물론 시골집에 돈도 없었구요. 모아둔 돈도 다 쓰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어요. 그게 바로 기륭전자였죠. 그리고 3년 정도 일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비정규직이 없었는데 제가 들어갈 당시부터 비정규직이 막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표시작오른쪽]기륭전자는 위성라디오를 주력으로 생산하며 네비게이션, GPS, SMD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사측이 비정규직 파견노동자를 잡담 등의 이유로 자유롭게 해고하는 것은 물론 휴대폰 문자로 해고통보를 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이자 180여명의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가 참여해 2005년 7월 4일 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 기륭전자분회를 설립했다.
이에 앞서 4월 경 기륭전자에서 소위 물갈이 해고로 불리는 집단해고 사태로 인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불법파견을 근절하기 위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 공동대응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5년 7월 8일 기륭전자에 대한 관악지방노동사무소의 불법파견 현장조사가 진행됐고 시정권고가 떨어지자 사측은 합법도급으로 전환했을 뿐, 기간 발생한 계약해지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며 교섭을 해태했다.
결국 14명의 노동자가 8월 24일부터 옥쇄투쟁에 돌입했고, 사측에서 10월 11일 단전단수와 직장폐쇄를 감행, 농성 54일째인 10월 17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며 16명이 연행됐다. 사측은 조합원 64명에 대한 고소고발과 함께 1인당 22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표끝]비정규직의 확산이라는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그 피해는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3년이 흘렀지만 나아진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게 다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겠죠. 길거리로 나오고서야 현실이 조금 보이네요. 미국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정부, 어쩜 이렇게 국민을 방치할 수 있는지...정권에만 눈이 멀어 국민을 못살게 하고...저절로 분노할 수밖에 없죠. 어쩜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는지...”
그래도 얻은 것은 있었다. 공장에서 보낸 3년 동안 어렸을 적 꿈이 배구선수였을 정도로 그렇게 좋아하던 스포츠와 멀어졌고, TV도 볼 수 없었지만 거리에서 보낸 1년 동안 자본과 권력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메커니즘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노동조합비도 회사에서 내주는 줄 알았어요. 내 자신이 비정규직이면서 비정규직이 뭔지도 몰랐다니까요. 소위 말하는 노동운동을 접하게 된거죠. 1년밖에 안됐지만 이제 사회 돌아가는 게 조금은 보여요. 그리고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만났죠. 자신의 삶은 뒤로 제쳐두고 제일 밑바닥에서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순수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우리 분회장 같은 사람만 있으면 금방 바뀌지 않을까요”
1년을 넘기고 또다시 좌절할 수도 있지만 그는 목숨을 걸었다. '끈질긴 투쟁', 그것은 이렇게 가는 길이 옳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함께 고생하며 생긴 서로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또 결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길이 옳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선 투쟁이잖아요.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용역경비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낙천적인 조합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린 가족입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오리온전기지회 노동자들이 천막농성장을 방문했다. 연대와 관심을 호소하는 그의 마지막 당부가 이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문제입니다. 큰 집회 한, 두 번으로는 해결날 수 없죠. 할 거면 힘을 모아서 결판이 날 때까지 해야지 않겠어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쉽지 않겠죠. 하지만 이왕 발 담근거 반드시 돌아갈 때까지 투쟁할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50일을 넘기는 공장 점거농성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질 당시 기륭전자는 굳게 닫힌 철문과 철조망, 용역경비의 폭력으로 유명세를 치러야만 했다.
기륭전자가 유명세를 타게끔 만든 장본인은 바로 기륭전자분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문자메세지로 보내진 비인간적 해고통보에 이들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하고 노동자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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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2월 경 환한 웃음을 띄고 있는 강화숙 부분회장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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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하지만 이리도 먼 길을 오게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투쟁이 지난 24일로 1년을 넘겼다.
구로공단에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은 그럴듯하게 포장됐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라 이들은 또 다시 목숨을 건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기륭전자분회 김소연 분회장과 강화숙(37) 부분회장은 지난 24일 투쟁 1주년을 기점으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투쟁 1주년을 기념해 단식농성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은 비단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만 처한 상황은 아니다. 목숨을 걸어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은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돼 버렸다.
“24일부터 6일째에요. 단식으로 몸이 안 좋아져서 얼굴에 약간의 두드러기가 났어요. 1년이 됐죠. 살아보려고 시작한 투쟁이 어느새 1년이 훌쩍 넘은 거에요. 그런데도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죠. 안타깝고 서럽죠...“
기륭전자 앞 천막농성장에서 만난 강화숙 부분회장은 또다시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넋두리를 시작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나서 두 끼는 굶어봤는데 처음 이렇게 해봐요. 견딜만하긴 한데, 모르겠어요. 그래도 끝까지 해야죠. 병원에 실려 가든지, 죽어나가든지. '오기' 하나로 하고 있어요. 누가 이기나 보세요...”
누가 그에게 목숨을 담보로 싸울 수밖에 없을 정도의 오기가 생기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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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이 됐지만 소복을 입은 채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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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전남 화순이 고향인 그는 20대를 서울에서 보냈다.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돼 가족이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어머니가 완쾌된 33살 때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2003년, 갓 제대한 남동생과 8살 어린 여동생을 보살펴야 했던 그는 결국 기륭전자에 몸을 실었다. 결혼도 해야 했지만 결혼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올라왔었죠. 물론 시골집에 돈도 없었구요. 모아둔 돈도 다 쓰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어요. 그게 바로 기륭전자였죠. 그리고 3년 정도 일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비정규직이 없었는데 제가 들어갈 당시부터 비정규직이 막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표시작오른쪽]기륭전자는 위성라디오를 주력으로 생산하며 네비게이션, GPS, SMD 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사측이 비정규직 파견노동자를 잡담 등의 이유로 자유롭게 해고하는 것은 물론 휴대폰 문자로 해고통보를 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이자 180여명의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가 참여해 2005년 7월 4일 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 기륭전자분회를 설립했다.
이에 앞서 4월 경 기륭전자에서 소위 물갈이 해고로 불리는 집단해고 사태로 인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불법파견을 근절하기 위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 공동대응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5년 7월 8일 기륭전자에 대한 관악지방노동사무소의 불법파견 현장조사가 진행됐고 시정권고가 떨어지자 사측은 합법도급으로 전환했을 뿐, 기간 발생한 계약해지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며 교섭을 해태했다.
결국 14명의 노동자가 8월 24일부터 옥쇄투쟁에 돌입했고, 사측에서 10월 11일 단전단수와 직장폐쇄를 감행, 농성 54일째인 10월 17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며 16명이 연행됐다. 사측은 조합원 64명에 대한 고소고발과 함께 1인당 22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표끝]비정규직의 확산이라는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그 피해는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3년이 흘렀지만 나아진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게 다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겠죠. 길거리로 나오고서야 현실이 조금 보이네요. 미국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정부, 어쩜 이렇게 국민을 방치할 수 있는지...정권에만 눈이 멀어 국민을 못살게 하고...저절로 분노할 수밖에 없죠. 어쩜 이렇게 악랄할 수가 있는지...”
그래도 얻은 것은 있었다. 공장에서 보낸 3년 동안 어렸을 적 꿈이 배구선수였을 정도로 그렇게 좋아하던 스포츠와 멀어졌고, TV도 볼 수 없었지만 거리에서 보낸 1년 동안 자본과 권력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메커니즘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노동조합비도 회사에서 내주는 줄 알았어요. 내 자신이 비정규직이면서 비정규직이 뭔지도 몰랐다니까요. 소위 말하는 노동운동을 접하게 된거죠. 1년밖에 안됐지만 이제 사회 돌아가는 게 조금은 보여요. 그리고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만났죠. 자신의 삶은 뒤로 제쳐두고 제일 밑바닥에서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순수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우리 분회장 같은 사람만 있으면 금방 바뀌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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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째 이어진 단식으로 심신이 지치지만 \"누가 이기나 지켜보라\"는 그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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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1년을 넘기고 또다시 좌절할 수도 있지만 그는 목숨을 걸었다. '끈질긴 투쟁', 그것은 이렇게 가는 길이 옳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함께 고생하며 생긴 서로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또 결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길이 옳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선 투쟁이잖아요.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용역경비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낙천적인 조합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린 가족입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오리온전기지회 노동자들이 천막농성장을 방문했다. 연대와 관심을 호소하는 그의 마지막 당부가 이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문제입니다. 큰 집회 한, 두 번으로는 해결날 수 없죠. 할 거면 힘을 모아서 결판이 날 때까지 해야지 않겠어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쉽지 않겠죠. 하지만 이왕 발 담근거 반드시 돌아갈 때까지 투쟁할 겁니다”
- ©민중의소리
- 기사입력: 2006-08-30 14:21:45
- 최종편집: 2006-08-31 1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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