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가 왜 ‘더 찔러’가 되는 거야?

문화인물 자연을 부르고 인간을 후비는 영혼의 ‘락산조’, 베이시스트 김영진

배혜정 기자

+ 글자크게 - 글자작게 글자 크기

도브로 기타를 튕기는 그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하다. 마치 농익은 여인의 몸을 희롱하듯 기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줄을 튕기고 쓰다듬고 흔들고 때린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정수리를 관통하듯 날카롭고 강렬한 전자음이 절정을 향해 치달아갔다. 묵직한 안정감 속에서 화려한 기교가 펼쳐졌고 연주자도 관객도 어느새 혼연일체가 돼 무아지경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신들린 듯한 11분간의 연주가 끝나자 짧은 정적을 뚫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4월 11일 홍대 앞 ‘요기가 갤러리’에서 열린 베이시스트 김영진의 도브로 기타 락산조(Rock Sanjo)연주였다.

신중현 밴드, 시인과 촌장, 노란 잠수함, 김수철의 작은 거인, 들국화, 신촌블루스...

한국 락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걸출한 락밴드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베이시스트 김영진(53). 네 가닥 현을 튕기며 한국 락음악의 명과 암을 연주해왔던 김영진은 이제 락과 전통고유의 산조를 합한 ‘락산조’를 전파하면서 새로운 음악세계를 개척해가고 있다. 김영진을 3월 31일과 4월 11일 두 차례 대학로와 홍대 앞에서 만났다.

베이시스트 김영진


락과 사랑에 빠진 소년

김영진을 처음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뮤직뱅크나 M-net 등에서 소개되는 말랑말랑한 가요를 흥얼거릴 줄 아는 정도를 대단한 미덕으로 여기는 기자가 한국 락음악과 인생을 같이한 거장을 만난다는 건 온 몸이 오그라들 만큼 긴장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락산조라니! 락도 모르는데 산조까지? ‘오 마이 갓!’ 그러나 기자의 ‘우려’가 ‘유쾌함’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영진은 베이스를 잡은 지 38년가량 된 뮤지션이다. 나이도 어느덧 50줄에 들어섰다. 그러나 꽃무늬 쫄바지에 긴 머리를 치렁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중지와 약지를 접고 ‘Peace’를 외쳐댈 것만 같다.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수줍은 듯 조근 조근한 목소리로 기자를 대하더니 점점 ‘락산조’니 ‘프랫리스 베이스’니 그만의 음악세계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사랑의 열병에 빠져버린 사춘기 소년처럼 들떠 이야기했다.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김영진이 가출을 하면서까지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데에는 피아노 학원 선생이었던 막내이모의 영향이 컸다. 매일같이 이모의 피아노 연주를 접했던 김영진은 자연스레 중학교 1학년 밴드부에 가입, 드럼 스틱을 잡고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선배인 홍순백, 오승근과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김영진은 그 당시 신중현, 조용필이 그러했듯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 1학년생이라 나이를 속이고 미8군 클럽 무대에 섰다. 아들이 시쳇말로 ‘딴따라’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한 아버지는 김영진의 베이스 기타를 수도 없이 박살내기도 했지만 가출을 감행하며 ‘투쟁’하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에보니스 알죠? 영원히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리...70년대 최고 듀엣 최기원, 윤영민 선배가 데리고 다니면서 잘한다 잘한다고 하니까 좋다고 따라 다녔지. 난 시작을 최고들과 한 거야.”

미군클럽에서 ‘백두산’의 유현상, ‘위대한 탄생’의 이권태와 그룹 활동을 하던 김영진은 78년 가수 이장희가 앨범을 제작해준다는 말에 이끌려 그룹사운드 ‘사랑과 평화’와 녹음을 함께 시작했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판이 엎어졌다. 김영진은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선 함구했지만 당시 가요계를 뒤흔들었던 소위 ‘대마초 파동’의 여풍을 받은 게 아닐까 추측된다.

“그때 앨범이 좌초된 이후에 20년이 지나서야 오롯이 내 음반이 나왔어.”

신중현 밴드, 시인과 촌장, 노란 잠수함, 김수철의 작은 거인, 들국화, 신촌블루스 등 걸출한 락밴드에 세션으로 참가한 그는 98년에서야 첫 솔로 앨범을 냈다. <들꽃>이었다.

“들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떤 영감을 받고 만든 앨범이야. 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너무 슬퍼서 울음도 안 나오는 상황에서 강촌에 앉아 멍하니 있는데 들꽃이 보이는 거야. 난 이상하게 정든 님이 가시면 들꽃이 보이더라고. 수많은 들꽃들이 나한테 얘기하는 거 같은데 냉정하고 평온한 진동이 저 밑에서부터 생기더라고. 그 상태에서 작사, 작곡하고 연주를 했지.”

<들꽃><야인><영천대음> 등 솔로 앨범 6장, 비매품으로 열댓 장의 음반을 냈지만 아쉽게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진 못했다.

“동료들조차도 ‘너무 깊게 가는 거 아니냐’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했어. 음이 너무 무겁다나. 누가 내 음악을 평가한 거 보니까 환각성이 강하다고 그러대.”

베이시스트 김영진


프랫리스 베이스에 빠지다

‘환각성이 강하다’, ‘무겁다’는 느낌은 김영진이 다루는 ‘프랫리스 베이스’의 특성이기도 하다.

정확한 음정을 내도록 기타의 넥에 세로로 박아 넣은 철심인 ‘프랫’을 박아 넣지 않아 악기자체에 음색이 없는 프랫리스 베이스 하나로만 연주를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랫리스 베이스는 전체 음악연주에서 양념정도로 다뤄지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진은 프랫리스 베이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 김영진에게 “비현실적이고 비음악적이다”, “정신 차려라”라는 동료들의 질책이 쏟아졌다.

“그런 얘기를 듣고도 굳이 이 악기로만 연주한 이유가 뭡니까?”

“17살 때 이 악기를 처음 접하고 나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 미술가들은 색깔로 감정을 노출하고 글 쓰는 사람은 언어로 감정을 노출하고 연주하는 사람은 악기로 감정을 노출하잖아. 그동안 피아노가 인간의 감정을 최고로 잘 노출시킨다고 생각했는데 이 악기를 접하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어. 이걸로 연주하면 내 감정이 너무 적나라하게 노출되니까 부끄러울 때가 있다니까.”

“이 악기를 안 만났으면 직업을 바꿨을지도 모른다”라고 까지 말하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악기는 깁슨 플랫리스 베이스(Gibson Fretless Bass)로서 50년대에 제작된 명기다.

“이걸로 연주하면 꼭 대낮에 소주 한 병을 딱 마신 느낌이야. 멍하니 몸이 가벼워지면서 어떨 땐 내가 아주 천한 벌레새끼만도 못한 느낌도 들면서, 어떨 땐 성직자처럼 고결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 의미 없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고. 최고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거지.”

악기와 소리에 희노애락의 감정을 싣는 김영진이 여러 가지 다양한 조로 짜여져 있어 다양한 감정의 이입이 가능한 산조와 락의 결합을 시도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교회음악부터 시작해서 미8군 무대에 섰을 땐 세계의 온갖 음악을 다 다뤄봤어. 보사노바, 삼바, 소울, 아프리카 음악, 일본음악...그땐 그걸 다 할 줄 알아야지, 못하면 무대에도 못 올라갔어. 그런데 90년대 들어 더 이상 서양에서 새로운 음악이 안 나오더라고. 그러다가 시도해본 게 산조야. 음악도 음식과 비슷한데 이런 저런 음식을 먹어보다 물리면 나중엔 자기가 요리법을 만들어내잖아. 음악도 마찬가지야. 부처음악, 예수음악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하다보면 나중에 ‘탁’하고 새로운 연주법이 터져 나와. 그런 게 바로 순수창작이지.”

그의 락산조는 프랫리스 베이스를 가지고 한국의 전통악기인 거문고나 가야금의 농현기법(왼손으로 현을 짚어 음을 흔들어주는 기법)을 그대로 소화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내 음악을 들으면 그냥 껌벅껌벅 가는 거야. 어디서 이런 영감을 얻느냐고, 자기네들은 죽어도 안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걔네들은 조상이 베토벤이고, 포스터고 멘델스존인데 그런 서양 음악가들이 동양음악의 기법을 알길 했겠어, 후손들에게 남기길 했겠어. 그런데 우리는 왕산악이나 우륵 같은 조상들이 있잖아. 예전에 왕산악이 거문고를 타면 학이 내려앉았다고 하잖아. 그거 진짜야. 나도 우리 집 마당에서 연주를 하면 주먹만한 지네가 툭 털어지고 새들이 날라들어. 동양음에서 나오는 파장이 그런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킨다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정도로 진지하고도 익살스럽게 락산조의 심오한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그였다.

기자에게 줄 선물로 가지고 나온 ‘영천대음(英天大音)’은 최초의 무반주 락산조 앨범이다. ‘덕’(德), ‘인’(仁), ‘효’(孝), ‘생’(生), ‘모’(母), ‘여름이 가는 바닷가’등 수록곡에는 모두 나름의 사연이 담겨 있다.

“83년돈가 대학로 샘터에서 신촌블루스 공연을 마치고 돈암동 집까지 걸어가는데 그날이 엄청 춥고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어. 혜화동성당 앞을 지나가다 들어가서 담배 한 대를 피려고 하는데 성모마리아상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야. 깜짝 놀라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달빛에 눈이 녹아 마리아상 얼굴에 눈물처럼 정확히 떨어지는 거였더라구. 그 때 그 감정을 이끌어내서 만든 게 ‘모(母)’라는 곡이야.”

가족들과 동해바다로 여름휴가를 떠난 어느 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금지옥엽 딸을 직접 구출한 뒤 솟구쳐 오르는 불안감과 안도감을 그 자리에서 곡과 가사로 풀어낸 것이 ‘여름이 가는 바닷가’이다.

영천대음 앨범을 살펴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사, 작곡, 믹싱, 녹음, 프로듀싱, 심지어 앨범 자켓 디자인까지 모두 혼자 작업을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1인 시스템’, ‘독고다이 시스템’이랄까.

“왜 이 작업들을 모두 혼자 하시는 겁니까? 혹시...”

‘혹시’다음의 말은 생략했으나 기자의 생각을 읽은 듯 그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며 도리질을 쳤다.

“악보를 그려줘서 남들한테 나눠주면 느낌이 안오더라구. 음식도 그렇잖아. 혼자 만들 때는 괜찮은데 부엌에 며느리랑 시어머니랑 같이 있으면 짜네, 싱겁네 엄청 싸우잖아. 음악도 마찬가지라서 한 사람이 쭉 만들어야지 엄청나게 미세한 감정이 살아나더라고.”

“그럼 예전에 그 많은 그룹 활동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러니까 몇 달씩 합숙하면서 엄청나게 연습 했다는 거 아니야. 하하.”

베이시스트 김영진


감정을 끄집어내야 한다

말랑말랑한 사랑노래가 대세인 요즘 음악계에 김영진은 어떤 시선을 던지고 있을까.

“음악이란 게 말이지. 남의 감정에 들어가서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잖아. 슬픈 사람에겐 슬픔을 풀어주고 화난 사람에겐 화를 풀어주는 그런 역할....근데 아휴, 요즘은 들으면 더 열 받으니까.”

“요즘 노래가 소음에 가깝다는 말인가요?”

“소음이 아니라 무식하다고 해야 하나. 팔이 가려운데 다리를 긁고 있으니까. 요즘 애들 가사를 보면 분명 ‘사랑해 사랑해’인데, 음의 파장을 계산해 보면 ‘사랑해’가 아니라 ‘더 찔러 더 찔러’인 거야. 개념이 없는 거지. 감정을 충실히 담은 음악이 아닌거야.”

그래서인지 의정부에서 베이스기타 전문실용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진은 문하생들에게 뜨거운 감정과 이야기 거리를 만들라고 주문하고 있다.

“지금 애들한테 말하는 게 너는 재주는 있는데 이야기 거리는 없다는 거야. 애들이 연주는 참 잘하는데 이야기 거리가 없으니까 음악이 공허해. 텅 비었어. 내가 그 애들 가슴에 뭔가를 심어줘야 할 텐데..요즘은 그게 참 고민이야.”

컨텐트 링크

민중의소리를 후원하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컨텐트 링크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을 불러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