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40주년에 햇빛을 본 미발표 유고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사상
1959년부터 1967년까지, 쿠바혁명의 승리에 대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사상은 크게 발전해 있었다. 만일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과 전지구 차원의 제국주의에 대한 항쟁이 그의 성찰과 정치활동의 핵심의제들이라면, 그때 이미 정착한 동유럽 (사회주의) 모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기에 대해 확산되고 있는 비판을 게바라는 1963년부터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소련과 소비에트 방식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환상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게바라의 동지 아르만도 하트(쿠바문화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위해 소련교과서 출판을 계기로 쿠바에서 드러난 “이념적 순응주의”를 ─ 이념지 펜사멘토 키리티코(비판적 사상)의 출판인들인 하바나대학교 철학부의 페르디난도 마티네즈 헤레디아, 오레리오 알폰소와 그의 동지들이 동시대에 옹호했던 집중적인 관점 ─ 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소련의 교과서들은 ─ 체 게바라가 “소련이 깔아 놓은 신작로라고 불렀다” ─ 동지들에게 자유롭게 사고(思考)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공산당이 이미 당신들을 위해 사고했고, 동지는 이를 단순히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
우리는 점점 더 확실하게, 보다 급진적이며 보다 평등하고 보다 연대성이 강한 사회주의건설의 다른 방식, 즉 다른 모델의 탐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체”의 저술들이 폐쇄된 시스템, 모든 것에 답하는 하나의 완성된 주장은 아니다:그의 성찰은 많은 문제들에 관해서 ─ 사회민주주의, 관료주의와의 투쟁 등 ─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1967년에 그가 사망함으로서, 중단되고 또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마르티네즈 헤레디아가 강조하는 이유는 이렇다:“체 게바라사상의 미완성은 (…) 그 자체로 긍정적인 측면이다. 위대한 사상이 거기에 있는 것이며, 문제점들과 여러 개의 길을 알려주고 그의 동지들에게 생각하고 공부하면서 이를 행동과 이론에 연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이 현실에 적용될 때, 그의 문장들과 처방들이 투기성이 강한 자유의 보루로 전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2)
초기에 ─ 1960~1962년 ─ 게바라는 이른바 “현존하는” 사회주의 “형제국(兄弟國)들”에 관해 많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수차의 소련과 다른 동유럽국들 방문 후, 그리고 쿠바의 초기 수년간 사회주의이행(移行) 후, 그는 점차 비판적 시각을 나타냈다. 게바라의 비판적 관점들은 여러 번의 기회에 공개적으로, 특히 1965년 유명한 “알제에서 연설”에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쿠바에서 진행된 경제문제에 대한 대논쟁 때, 그는 사회주의의 근원적 접근을 표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 논쟁에서 ─ 소련과 같은 ─ 기업들의 독립과 이윤추구의 “시장사회주의” 주창자들과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기준에 기초하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를 옹호하는 게바라파가 대립했다:그는 이익에 대한 프리미엄과 시장에 대한 고정가격제보다 확실한 재부(財富)와 서비스의 무상제공을 제안했다. 그런데 체의 발언은 대단히 불투명하다:누가 근본적으로 경제에 관한 결정을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계획경제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또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 게바라의 미발표 문건들이 새로운 관점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소련의 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교과서에서(1963년 스페인어판) ─ 할트에 보낸 편지에서 상기한 “신작로들” 가운데 하나 ─ 1965~1966년 탄자니아와 특히 프라하 체재 시 집필한 ─ 비판적 노트들이 문제이다. 단 한권의 저서나 하나의 논문이 아니라 때때로 시니컬하고 아이러니한 코멘트들이3) 붙은 하나의 소련 출판물에 대한 요약문의 컬렉션이다.
대단히 오래 전부터 우리는 이 문서들의 출판을 기다려 왔다. 최근 10여 년 동안 이 문서는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무엇보다도 쿠바의 몇몇 연구자들이 이 문서를 열람하고 몇 구절을4) 인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서를 출판한 하바나의 ‘체 게바라 연구센터’의 마리아 델 카르멘 아리에트 가르시아 덕분에 오늘날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개방되었다. 확대된 이 문서의 출판은 다른 미발표 유고들도 포함하고 있다:책 서문으로 활용된 1965년4월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술에 관한 노트들 ; 게바라와 산업부 협력자들간 대화록의 발췌(1963~1965):1970년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출판된 여러 인사들에게 보낸 서한들(폴 스위지, 샤를르 베텔하임 등) ; 이집트 신문 알 타리아흐와 가진 회견문의 요약(1965년4월).
문서들은 체 게바라 정신의 독립성과 “현존” 사회주의와 비판적 거리두기 및 급진적인 다른 길의 추구 등을 동시에 증언하고 있다. 그는 또한 성찰의 한계성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체 게바라가 이 순간에 ─ 이 문제에 관해 그의 분석이 1966~1967년에 진전되었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 스탈린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1960년대에 소련의 위기를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에서 찾았다! 분명하게 게바라는 만일 레닌이 더 오래 살았다면 ─ “그가 죽는 과오를 범했다”고 풍자를 담아 기록했다 ─ 그는 가장 퇴보적 결과들을 수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NEP에 의해 도입된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자본주의의의 회복이라는 의미에서, 1963년 소련에서 관찰되는 현상이 됨으로써 심각한 표류현상을 유도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게바라의 NEP에 대한 모든 비판은 상당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때때로 1925~1927년 (소련내부에서) 좌파의 반대파의 비판과 일치하고 있다 ; 예를 들면, “간부들이 특권계급(caste)의 시스템에 결합되고 있다”라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소련에서 NEP를 친자본주의 경향의 책임을 지우는 역사적 가정(假定)이 공개적으로 조작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바라가 스탈린의 해악적(害惡的) 역할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노트들”에서 세밀하면서도 놀라운 구절들이 나타나고 있다:“스탈린의 가공할 역사적 범죄는 공산주의 교육을 경멸하게 했고, 권위에 대한 무제한적 개인숭배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이것이 아직 스탈린의 현상분석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게바라의 노트는 (스탈린주의를) 이미 단호하게 부정을 한 것이다.
“알제의 연설”에서 게바라는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국가들이 “서구의 착취국가들과 함께 전술적 공범관계를 청산하고,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인민들과 같이5) 교환관계로 해석될 만한 거래를 요구했다. 이 질문은 소련교과서에 관한 “비판적 노트들”에 여러 번 반복되어 간조되고 있다.
누가 경제계획을 해야 하는가?
소련의 공식교과서 저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상호원조를 자랑하고 있는 동안, 쿠바의 전 산업장관 게바라는 이것이 현실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만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각 정부들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성공이 될 것이다. 만일 국제주의가 (초강대국 또는 약소국들의) 쇼비니즘 또는 소련에 대한 순종으로 대체된다면, 이것은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온당한 모든 꿈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몇 페이지 넘어서 “우호협력”이 토대가 되어 사회주의국가들 간의 노동분업에 관한 ‘교과서의 축하’에 대한 풍자적 평가에서 이렇게 관찰하고 있다:“CAME”6)이라는 바구니의 게들이 실제에 있어서 이러한 단언을 부정하고 있다. 텍스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진정한 집행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하나의 이상(理想)을 준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불행하게도 부재(不在)하다” 다른 문장도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국가들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패권주의, 불평등, 교환, 경쟁, 어느 정도까지는 수탈과 확실한 약소국의 강대국에 대한 종속현상들의” 발견을 슬프게도 확인하고 있다.
드디어 소련교과서에서 “공산주의의 건설”이라고 말할 때, 이러한 수사적 질문을 비판적으로 던진다:“오직 한 국가에서만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가?” 하나의 다른 서술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체는 확인하기를, 레닌은 “곧 이어 바로 부정당한 일종의 혁명의 보편적 성격을 분명히 확인했다 ─ “유일한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투명한 하나의 준거7).
소련교과서에 대한 게바라의 대다수 비판은 1963~1964년간 경제문제에 관한 글들과 거의 같다:시장규칙에 따라 가동하는 독립적인 공장들과 가치법칙에 반대하는 중앙집중 계획경제의 옹호 ; 개인주의를 자극하는 통화제도에 반대하는 공산주의교육의 옹호. 게바라는 그가 부패비리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공장지도자들의 물질적 이익참여를 역시 불안하게 생각했다.
게바라는 계획경제를 사회주의건설 과정의 중심축(中心軸)으로 옹호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을 경제적 조건에서 해방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 쿠바에서는 노동자들이 계획의 수립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누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 1963~1964년의 논쟁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1965~1966년의 “비판적 노트들”에서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이론적 진전을 발견할 수 있다:몇몇 구절들은 중대한 경제적 결정들이 인민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제시했다. 인민대중이 경제계획의 수립과정에 참여해야 하며, 계획의 집행은 순전히 기술적 사업(事業)일 뿐이라고, 체는 썼다. 체의 견해로는 소련에서, “그들의 역할을 인식한 인민대중의 경제적 결정으로써” 계획경제의 개념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경제적 방편들이 심리적 진정제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인민대중은 “얼마나 축적이 되며 또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지를 결정함으로서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가능성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게바라는 강조했다 ; 경제기술은 ─ 인민이 결정한 ─ 통계수치와 병행해 실시되어야 하고, “인민대중의 의식은 그의 실행을 확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몇 번이나 더 재론되고 있다:그가 쓰기를,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민은 “마치 그 계획이 전문가들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성장률, 축적-소비 등) 나라의 거대한 문제들에 관해 결정할 것이다.” 경제적 결정과 그 집행 간의 너무나 기계적인 분리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 이러한 양식(樣式)에 의해, 게바라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이념의 실현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 그는 아직 모든 정치적 결론 ─ 권력의 민주화, 정치적 다양성, 조직의 자유 ─ 을 도출하지 않았지만, 경제적 민주화의 새로운 비전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가 없다.8)
우리는 이 노트들에서 소련 모델을 민주적 공산주의로 대체하려고 하는 게바라의 길에서 중요한 한 단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미국 CIA에 봉사하는 볼리비아의 살인자들에 의해서 1967년 갑작스럽게 중단된 새로운 하나의 길 말이다.
미카엘 로위 | 번역·주섭일 본지 상임고문
1) 오랫동안 미발표로 남았던 이 편지는 Nestor Kohan,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다른 길이 가능하다, Nuestra America, Buenos Aires, 2003, p 156-158에 전재되었다.
2) “Che, el socialismo y el comunismo”, 체의 사상에서, Centro de estudios sobre America, Editorial Jose Marti, La Havane, 1989, 제2권 30쪽.
3)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정치경제학의 비판적 노트, Ocean Press, Editorial de Ciencias Sociales, La Havane, 2006.
4) Carlos Tablada, El pensamiento economica de Ernesto Che Guevara(1987년 이래 30판 인쇄출판; 2005년 Ruth Casa Editorial 최신판)을 읽으라.
5)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전집 1957-1967, 마스페로 출판사, 파리, 1970년 제2권, 574쪽.
6) (공산진영의) 상호경제원조기구, 현존사회주의권의 일종의 구주공동시장, 영어로는 Comecon이다.
7) 레닌이 이전에 옹호했던 “국제주의자들”의 원칙과 모순이다, 1924년 스탈린이 지지한 이 이론은 1925년12월18일 소련공산당 14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8) 같은 책에 발표된 게바라 산업장관의 협력자들과의 토론들에서 그가 여러 번 자유토론의 원칙을 옹호한 것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렇게 해서 1964년12월 토론에서 게바라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힘으로 여론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지성(知性)의 모든 자유로운 발전을 막아 버린다.”
1)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지구화한 정의, 해방과 사회주의, Mille et une nuit, Paris, 2007, 139쪽, 25유로.
2) 장 오르티즈, 체, 어느 때보다도 더, Atlantica, Biarrits, 2007, 358쪽, 25유로.
3)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모터사이클 여행, 라몽 차오의 후기, Mill et un nuit, Paris, 2007, 218쪽, 14유로 (한국어판-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홍민표 역, 화매, 2007-역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소련과 소비에트 방식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환상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게바라의 동지 아르만도 하트(쿠바문화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교육을 위해 소련교과서 출판을 계기로 쿠바에서 드러난 “이념적 순응주의”를 ─ 이념지 펜사멘토 키리티코(비판적 사상)의 출판인들인 하바나대학교 철학부의 페르디난도 마티네즈 헤레디아, 오레리오 알폰소와 그의 동지들이 동시대에 옹호했던 집중적인 관점 ─ 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소련의 교과서들은 ─ 체 게바라가 “소련이 깔아 놓은 신작로라고 불렀다” ─ 동지들에게 자유롭게 사고(思考)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공산당이 이미 당신들을 위해 사고했고, 동지는 이를 단순히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
우리는 점점 더 확실하게, 보다 급진적이며 보다 평등하고 보다 연대성이 강한 사회주의건설의 다른 방식, 즉 다른 모델의 탐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체”의 저술들이 폐쇄된 시스템, 모든 것에 답하는 하나의 완성된 주장은 아니다:그의 성찰은 많은 문제들에 관해서 ─ 사회민주주의, 관료주의와의 투쟁 등 ─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1967년에 그가 사망함으로서, 중단되고 또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마르티네즈 헤레디아가 강조하는 이유는 이렇다:“체 게바라사상의 미완성은 (…) 그 자체로 긍정적인 측면이다. 위대한 사상이 거기에 있는 것이며, 문제점들과 여러 개의 길을 알려주고 그의 동지들에게 생각하고 공부하면서 이를 행동과 이론에 연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이 현실에 적용될 때, 그의 문장들과 처방들이 투기성이 강한 자유의 보루로 전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2)
초기에 ─ 1960~1962년 ─ 게바라는 이른바 “현존하는” 사회주의 “형제국(兄弟國)들”에 관해 많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수차의 소련과 다른 동유럽국들 방문 후, 그리고 쿠바의 초기 수년간 사회주의이행(移行) 후, 그는 점차 비판적 시각을 나타냈다. 게바라의 비판적 관점들은 여러 번의 기회에 공개적으로, 특히 1965년 유명한 “알제에서 연설”에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쿠바에서 진행된 경제문제에 대한 대논쟁 때, 그는 사회주의의 근원적 접근을 표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 논쟁에서 ─ 소련과 같은 ─ 기업들의 독립과 이윤추구의 “시장사회주의” 주창자들과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기준에 기초하는 중앙집중적 계획경제를 옹호하는 게바라파가 대립했다:그는 이익에 대한 프리미엄과 시장에 대한 고정가격제보다 확실한 재부(財富)와 서비스의 무상제공을 제안했다. 그런데 체의 발언은 대단히 불투명하다:누가 근본적으로 경제에 관한 결정을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계획경제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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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와 또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 게바라의 미발표 문건들이 새로운 관점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소련의 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교과서에서(1963년 스페인어판) ─ 할트에 보낸 편지에서 상기한 “신작로들” 가운데 하나 ─ 1965~1966년 탄자니아와 특히 프라하 체재 시 집필한 ─ 비판적 노트들이 문제이다. 단 한권의 저서나 하나의 논문이 아니라 때때로 시니컬하고 아이러니한 코멘트들이3) 붙은 하나의 소련 출판물에 대한 요약문의 컬렉션이다.
대단히 오래 전부터 우리는 이 문서들의 출판을 기다려 왔다. 최근 10여 년 동안 이 문서는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무엇보다도 쿠바의 몇몇 연구자들이 이 문서를 열람하고 몇 구절을4) 인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서를 출판한 하바나의 ‘체 게바라 연구센터’의 마리아 델 카르멘 아리에트 가르시아 덕분에 오늘날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개방되었다. 확대된 이 문서의 출판은 다른 미발표 유고들도 포함하고 있다:책 서문으로 활용된 1965년4월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술에 관한 노트들 ; 게바라와 산업부 협력자들간 대화록의 발췌(1963~1965):1970년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출판된 여러 인사들에게 보낸 서한들(폴 스위지, 샤를르 베텔하임 등) ; 이집트 신문 알 타리아흐와 가진 회견문의 요약(1965년4월).
문서들은 체 게바라 정신의 독립성과 “현존” 사회주의와 비판적 거리두기 및 급진적인 다른 길의 추구 등을 동시에 증언하고 있다. 그는 또한 성찰의 한계성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체 게바라가 이 순간에 ─ 이 문제에 관해 그의 분석이 1966~1967년에 진전되었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 스탈린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1960년대에 소련의 위기를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에서 찾았다! 분명하게 게바라는 만일 레닌이 더 오래 살았다면 ─ “그가 죽는 과오를 범했다”고 풍자를 담아 기록했다 ─ 그는 가장 퇴보적 결과들을 수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NEP에 의해 도입된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자본주의의의 회복이라는 의미에서, 1963년 소련에서 관찰되는 현상이 됨으로써 심각한 표류현상을 유도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게바라의 NEP에 대한 모든 비판은 상당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때때로 1925~1927년 (소련내부에서) 좌파의 반대파의 비판과 일치하고 있다 ; 예를 들면, “간부들이 특권계급(caste)의 시스템에 결합되고 있다”라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소련에서 NEP를 친자본주의 경향의 책임을 지우는 역사적 가정(假定)이 공개적으로 조작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바라가 스탈린의 해악적(害惡的) 역할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노트들”에서 세밀하면서도 놀라운 구절들이 나타나고 있다:“스탈린의 가공할 역사적 범죄는 공산주의 교육을 경멸하게 했고, 권위에 대한 무제한적 개인숭배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이것이 아직 스탈린의 현상분석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게바라의 노트는 (스탈린주의를) 이미 단호하게 부정을 한 것이다.
“알제의 연설”에서 게바라는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국가들이 “서구의 착취국가들과 함께 전술적 공범관계를 청산하고,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인민들과 같이5) 교환관계로 해석될 만한 거래를 요구했다. 이 질문은 소련교과서에 관한 “비판적 노트들”에 여러 번 반복되어 간조되고 있다.
누가 경제계획을 해야 하는가?
소련의 공식교과서 저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상호원조를 자랑하고 있는 동안, 쿠바의 전 산업장관 게바라는 이것이 현실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만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각 정부들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성공이 될 것이다. 만일 국제주의가 (초강대국 또는 약소국들의) 쇼비니즘 또는 소련에 대한 순종으로 대체된다면, 이것은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온당한 모든 꿈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몇 페이지 넘어서 “우호협력”이 토대가 되어 사회주의국가들 간의 노동분업에 관한 ‘교과서의 축하’에 대한 풍자적 평가에서 이렇게 관찰하고 있다:“CAME”6)이라는 바구니의 게들이 실제에 있어서 이러한 단언을 부정하고 있다. 텍스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진정한 집행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하나의 이상(理想)을 준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불행하게도 부재(不在)하다” 다른 문장도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국가들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패권주의, 불평등, 교환, 경쟁, 어느 정도까지는 수탈과 확실한 약소국의 강대국에 대한 종속현상들의” 발견을 슬프게도 확인하고 있다.
드디어 소련교과서에서 “공산주의의 건설”이라고 말할 때, 이러한 수사적 질문을 비판적으로 던진다:“오직 한 국가에서만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가?” 하나의 다른 서술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체는 확인하기를, 레닌은 “곧 이어 바로 부정당한 일종의 혁명의 보편적 성격을 분명히 확인했다 ─ “유일한 국가에서 사회주의”의 투명한 하나의 준거7).
소련교과서에 대한 게바라의 대다수 비판은 1963~1964년간 경제문제에 관한 글들과 거의 같다:시장규칙에 따라 가동하는 독립적인 공장들과 가치법칙에 반대하는 중앙집중 계획경제의 옹호 ; 개인주의를 자극하는 통화제도에 반대하는 공산주의교육의 옹호. 게바라는 그가 부패비리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공장지도자들의 물질적 이익참여를 역시 불안하게 생각했다.
게바라는 계획경제를 사회주의건설 과정의 중심축(中心軸)으로 옹호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을 경제적 조건에서 해방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 쿠바에서는 노동자들이 계획의 수립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누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 1963~1964년의 논쟁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1965~1966년의 “비판적 노트들”에서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이론적 진전을 발견할 수 있다:몇몇 구절들은 중대한 경제적 결정들이 인민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분명히 제시했다. 인민대중이 경제계획의 수립과정에 참여해야 하며, 계획의 집행은 순전히 기술적 사업(事業)일 뿐이라고, 체는 썼다. 체의 견해로는 소련에서, “그들의 역할을 인식한 인민대중의 경제적 결정으로써” 계획경제의 개념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경제적 방편들이 심리적 진정제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인민대중은 “얼마나 축적이 되며 또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지를 결정함으로서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가능성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게바라는 강조했다 ; 경제기술은 ─ 인민이 결정한 ─ 통계수치와 병행해 실시되어야 하고, “인민대중의 의식은 그의 실행을 확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몇 번이나 더 재론되고 있다:그가 쓰기를,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인민은 “마치 그 계획이 전문가들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성장률, 축적-소비 등) 나라의 거대한 문제들에 관해 결정할 것이다.” 경제적 결정과 그 집행 간의 너무나 기계적인 분리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 이러한 양식(樣式)에 의해, 게바라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이념의 실현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 그는 아직 모든 정치적 결론 ─ 권력의 민주화, 정치적 다양성, 조직의 자유 ─ 을 도출하지 않았지만, 경제적 민주화의 새로운 비전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가 없다.8)
우리는 이 노트들에서 소련 모델을 민주적 공산주의로 대체하려고 하는 게바라의 길에서 중요한 한 단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미국 CIA에 봉사하는 볼리비아의 살인자들에 의해서 1967년 갑작스럽게 중단된 새로운 하나의 길 말이다.
미카엘 로위 | 번역·주섭일 본지 상임고문
1) 오랫동안 미발표로 남았던 이 편지는 Nestor Kohan,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다른 길이 가능하다, Nuestra America, Buenos Aires, 2003, p 156-158에 전재되었다.
2) “Che, el socialismo y el comunismo”, 체의 사상에서, Centro de estudios sobre America, Editorial Jose Marti, La Havane, 1989, 제2권 30쪽.
3)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정치경제학의 비판적 노트, Ocean Press, Editorial de Ciencias Sociales, La Havane, 2006.
4) Carlos Tablada, El pensamiento economica de Ernesto Che Guevara(1987년 이래 30판 인쇄출판; 2005년 Ruth Casa Editorial 최신판)을 읽으라.
5)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전집 1957-1967, 마스페로 출판사, 파리, 1970년 제2권, 574쪽.
6) (공산진영의) 상호경제원조기구, 현존사회주의권의 일종의 구주공동시장, 영어로는 Comecon이다.
7) 레닌이 이전에 옹호했던 “국제주의자들”의 원칙과 모순이다, 1924년 스탈린이 지지한 이 이론은 1925년12월18일 소련공산당 14차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8) 같은 책에 발표된 게바라 산업장관의 협력자들과의 토론들에서 그가 여러 번 자유토론의 원칙을 옹호한 것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렇게 해서 1964년12월 토론에서 게바라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힘으로 여론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지성(知性)의 모든 자유로운 발전을 막아 버린다.”
- 게릴라 영웅의 최후의 신화-레노 랑베르 RENAUD Lam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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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상품 인간”을 정열적으로 비난한 사람이 물질을 경시하면서도 동시에 물질을 숭배하는 양식(樣式)의 표상이 된 것이 분명히 아이러니라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사망 40주년 기념은 체…가 단순히 티-셔츠와 사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게릴라 영웅”의 신화가 자주 정치사상의 기억에 대해 빛을 잃게 할 때, 게바라는 제도화된 후세의 괴상한 의상(衣裳)을 입히려 기도하는 ─ 완전히 무장이 해제된 ─ “호감을 주는 반항아”의 지위가 보다 더 값어치가 있다. 왜냐하면 체는 어떠한 도그마에도 배제되지 않을 정도의, 완전한 비공격성을 제외하면, 대단한 자유정신의 소유자이고 또 자유의 장본인이다.
아무튼, “위대한 텍스트들”1)의 독서에 다시 빠져들면, 4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세계를 관통해 온 좌파의 사회적 해방의 이상이 퇴색한 나머지 연속적인 수정과 직접 연관된 난점들을 자아낸다. 이것은 게바라 사상의 핵심주제들 가운데 하나인 오늘날에도 문제제기가 계속되고 있는 도덕성의 문제를 ─ 역사적 관점의 필요성과 아울러 ─ 제시하는 장 오르티즈2)가 종합적으로 기여한 (게바라에 대한) 해석들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상 어떻게 도덕성 그리고 분해될 수 없이 밀착된 윤리성이 ─ 개인과 직결된 근본적 미덕으로 치환해버리는 언어의 구절들 ─ 지배 시스템의 개인화, 계급의식의 소멸, 투쟁을 위한 연대의 분쇄에 의해 바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사회적 변혁의 희망을 과연 구체화할 수 있는가?
이러한 가치들이 오늘날 사회적 성공의 평가 또는 실업문제의 해결을 위한 언론의 다원주의 속에서 개인의 책임을 앞세움으로써 특징화되는 “부르주아이념의 도구”에 직결되어 있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체가 1960년대 쿠바에서 “새로운 인간”(동시에 미덕을 갖고 도덕적인)의 개념을 발전시킨 사실을 망각하는 것과 같다. 경제적 변화는 이미 진전되고 있으나 결론은 분명하다:(경제모델로서의) 사회주의는 인간해방에 충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생산현상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의식현상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만일 인간이 의식화된다면, (…)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로 규정한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고 게바라는 썼다.
이렇게 하여, 개인주의 혁명의 유일한 동력을 이루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인간의 개념은 ─ 사회주의 이상이 그의 해석이 “현실화된” 해석에 의해 각인되는 상황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 프랑스와 우타르의 설명과 같이 “포기할 수 없는 혁명적 프로세스와 이와는 반대로 경제사회구조의 변화전망을 중심의제로 자리매김 한다.”
체의 사상은 그가 정치적 (신념과) 일치해서 혁명적 의식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행동키로 결정했을 때인 젊은 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를 오토바이로 횡단 여행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3) 그는 이미 “세계차원에서 그의 (사회주의) 건설이 실현되지 않으면, 죽음 이외에 다른 끝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바라는 그래서 손에 무기를 들고 39세를 일기로 절명했다. 체의 사상이 영원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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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지구화한 정의, 해방과 사회주의, Mille et une nuit, Paris, 2007, 139쪽, 25유로.
2) 장 오르티즈, 체, 어느 때보다도 더, Atlantica, Biarrits, 2007, 358쪽, 25유로.
3)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모터사이클 여행, 라몽 차오의 후기, Mill et un nuit, Paris, 2007, 218쪽, 14유로 (한국어판-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홍민표 역, 화매, 2007-역주)
-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 기사입력: 2008-03-19 18:57:40
- 최종편집: 2008-03-20 08:5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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