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반유대주의 그리고 전(前) 대통령 제임스 카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뉴욕 포스트 지는 지난 1월 15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자문하고 있다. 별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한 독자들은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그룹의 한 일간지가 조지 부시를 지목하여 이 질문을 던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실패한 대통령에다가, 좌파 폭군들의 친구가 되었으며, 미국의 합법적 이익과 관계된 모든 면에 있어서 세계적인 중상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고인이 된 ‘이스라엘의 천적’ 야세르 아라파트의 대외관계 고문이었고, 나아가 대량 살상을 변명하고 나서기까지 했던“ 이 대통령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바로 제임스 카터이다. ”그는 도를 넘어 섰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분노한 뉴욕 포스트 지는 이 백악관의 전 주인이 밝힐 수 있는 모든 점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것을 민주당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전(前) 대통령(1977-1981)이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가? 카터는 '팔레스타인:인종차별이 아닌 평화를'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한 권 집필했다. 그리고 그는 이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만약 탄압이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대에서 계속 된다면, 또한 만약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의 국가 건립을 주제로 협상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종차별 과 유사한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물론 이 상황이란 “두 민족이 같은 땅에 살고 있지만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 국민들이 억압과 폭력으로 팔레스타인들에게서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박탈하고 지배적인 입장에 서는” 그런 상황을 말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반인종주의연맹(ADL)은 여러 신문 지상에서 카터가 반유대주의를 표명했다는 기사를 실어 그를 맹렬하게 비난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비난에 맞서 카터는 자신의 그런 입장이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상황의 효과를 참고로 한 것이지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에 관계된 것은 아니었노라고 응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카터의 비교는 미국 유대인 공동체 일각으로부터 첨예한 반응을 유발시켰다. 이 공동체들은 반인종주의연맹의 입장을 따라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모든 비판을 반유대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민주당은 뉴욕 포스트 지의 권고를 경청했으며, 민주당 대표인 하워드 딘과 하원 의장 낸시 펠로시는 카터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 사건은 매우 난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거 기간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자들의 생각을 달랐다. 카터의 저서는 출간 이후 여러 달에 걸쳐 꽤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정치분석가이자 중동프로젝트의 책임자인 헨리 사이그먼의 평가에 따르면, 이 저서에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솔직한 의견이 담겨져 있으며, 이 저서로 인해 발생한 파장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미국의 정치 계층, 즉 민주당이나 공화당 의원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카터는 문제의 저서에서 삼십년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군대의 시나이 반도로부터의 철수와 관련된 캠프 데이비드협정(1978) 조인을 위해 이스라엘의 입장과 이집트의 입장을 조정했던 일에 대한 기억들과 당시 그 지역 지도자들과의 연쇄 접촉을 회고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그 당시의 분쟁에 대한 교훈적 해석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는 두 공동체가 국가를 소유할 필요성과 이스라엘을 위한 충분한 안전보장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기존의 평화 유지를 위한 균형 잡힌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편견 없는 독자가 읽으면 이 저서는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터를 비방하는 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와 같은 비판은 결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억압이 계속된다면 테러리즘은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이 카터의 주된 주장이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지금과 같은 시기에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의당 스캔들로 여겨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주장이 아닌가? 카터는 또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통제와 식민지 지배는 신성한 땅에서 광범위한 평화 협정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이다. 팔레스타인들의 테러 행위를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그러나 뉴욕 타임즈 지 비평가 에단 브로너에 따르면 “불충분한” 비판이다−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협정 이후 특히 평화 협정을 방해했던 장본인들은 바로 이스라엘 당국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어떻게 맨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이 UN 결의안 242조와 338조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 평화 협정의 적용을 먼저 나서서 거절했는가를 상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결의안은 실제로 무력에 의한 영토의 탈취를 금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군대의 요르단강 서안 지대와 가자 지구로부터의 철수와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이스라엘과는 다른 정치적 실체로서 인정할 것과, 그들에게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온주의의 이상들―예컨대 자유의 모델이자 안식처로서의 국가를 만드는 것―
이 사라졌다
게다가 카터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즉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이스라엘 수상 에후드 바라크, 야세르 아라파트 사이에 정상회담(2000년 7월 24일)이 개최되었을 때, 팔레스타인들의 국가 설립과 관련해서 아라파트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제안이 없었다는 주장, 따라서 아라파트가 좋은 기회를 놓치고 평화 협정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이미 일반적으로 공인된 사실을 반박했다는 이유로 카터는 클린턴 대통령의 중동지역 특사였던 데니스 로스로부터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카터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다른 전문가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았다.
카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랍 세계와 유럽에서는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에 대해 고심을 덜하고 있다는 감정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영토 내에서 점령 세력에 속박되지 않은 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 비록 유럽과 아랍 세계에서 보편화되어 있다고 해도 이와 같은 주장은 실제로 미국에서는 아주 생소한 것이다.
전 대통령이자 평화와 분쟁 해결을 위한 카터연구소의 책임자인 카터는 또 다시 조지 부시 정부가 팔레스타인드를 포기함으로써 그들을 슬픈 운명에 처하도록 방조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한편, 이스라엘이 협정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부시와 올메르트 정부가 2007년 3월에 팔레스타인 연합정부 ―파타와 하마스― 와의 협상을 거부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종차별을 들먹임으로써 호된 공격을 받은 카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반복해서 하건 데 평화에 대한 대가는 곧 이스라엘 내부에서가 아닌 요르단강 서안지대와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자행되고 있는 분명 인종차별이다. 바로 이 지역들 내에서 가장 경멸적인 형태의 인종차별이 행해지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곳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카터는 이 지역들 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조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우선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안전 보장책들, 그 다음으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폭력의 근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1967년 이전의 국경을 중심으로 그들의 국가를 소유할 권리에 대한 이스라엘의 재인정 등등이 그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요르단강 서안지대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훨씬 더 열악하고 견딜 수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 카터의 판단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에서는 다른 나라로부터 유입된 수많은 이주민들로 인해 팔레스타인들의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있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합법적인 제도를 통해 시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안전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식민지배자들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 점령 지역에서 자국민들의 삶과 기반시설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팔레스타인인들을 겨냥한 주도면밀한 통제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최근까지 뉴욕 타임즈 지의 책임자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특파원이었던 조셉 렐리벨드는 아주 긴 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카터가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적용시키면서 이 개념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터가 이 개념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리와 이스라엘이 행한 영토의 몰수 행위에만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랠리벨드에 따르면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으며, 인종차별과 이스라엘식 시스템 사이의 유사점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상황들을 비교하면서 렐리벨드는 이스라엘 정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족주의적 체제와 마찬가지로 영토를 점진적으로 탈취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정책이 시행되었을 때 법령에 따라 개인의 이동을 조정하는 매우 복잡한 허가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오늘날 이스라엘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왕래를 분류하고 제한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제도를 가동시키고 있다. 영국 신문 가디언 지의 예루살렘 특파원 크리스 맥그렐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국적과 거주지에 관한 일련의 법을 제정해서 한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자민족과 타민족에게 달리 적용하는 정부는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불의가 자행되는 곳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한 곳은 인종차별정책을 실제로 실행되었던 남아프리카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곳은 바로 이스라엘이다.”
실제로 크리스 맥그렐은 십년 동안 가디언 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의 여러 양상과 인종차별의 여러 양상을 비교함으로써 억압의 형태에서 뿐만 아니라 부과된 고통에서도 많은 유사성을 확인하고 있다. 예컨대 예루살렘 시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의 측면을 보면, 종종 이 도시의 합병된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과 비교해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양질의 서비스가 행해지고 있다. 가디언 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밀한 군사적 관계에 대한 비교 기사가 게재된 직후, 미국 내 중동보고 정확성 검토위원회(Camera)는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훼손하고자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날조했다는 이유를 들어 맥그렐을 비난하고 나섰다.
사실 이스라엘 정부가 인종차별과 유사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비난은 심지어 이스라엘에서조차도 점점 더 빈번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이스라엘 법에 근거해 수년간 팔레스타인인들을 변호해 온 용감한 변호사 다니엘 사이드먼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인권 수호 조직들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과 이스라엘인들의 팔레스타인 영토 장악이라고 하는 이 두 시나리오를 연구해 왔다. 예를 들어 독일의 프레드리히-에베르트 사회민주재단은 협상 절차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변화에 관한 연구, 그리고 그로부터 교훈을 끌어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에 관한 세 가지의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배척은 1948년에 발생했던 75만 명의 추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이 배척 정책은 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히는 방식으로 계속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국가 건립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도록 했으며, 또한 멀리 떠나거나 아니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층민으로서의 제한된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이와 같은 해석에 따르면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 또한 그 민족에 대한 일종의 포위 방식이었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한 권의 저서에서 이안 파프는 자신의 조국이 팔레스타인 민족을 이주시키고 하층민의 지위에 따르도록 하기 위해 사용했던 억압적이고 제도적인 행태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 대통령 카터보다 더 급진적인 의견을 개진하면서 파프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만약 “인종청소”가 “민족적으로 혼합된 국민을 동질화하기 위해서 특정 영토나 지역으로부터 강제로 추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또한 만약 “이와 같은 추방의 의도가 추방시키는 자의 마음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다수 거주민들의 철거를 유발시키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지난 60여 년 동안 이 정책을 실행해 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에도 역시 득이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간행된 한 유태인 잡지인 티쿤(Tikkun) 지에 실린 한 기사에 따르면, 시온주의가 내세운 이상들 ―세계 속 유태인 공동체에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자유의 모델이 되는 국가를 만드는 것― 이 사라지고 있다. 가령 제롬 슬레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온주의의 꿈은 악몽이 되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인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보다 더 위험한 장소 없기 때문이고, 또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그들의 땅으로부터 빼앗은 원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카터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했던 비판들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라쉬드 칼리디의 저서에서 좀 더 자세하게 그 모습을 나타낸다. 2003년에 콜럼비아 대학의 에드워드 사이드 석좌교수직과 이 대학 중동연구소의 소장직을 수락한 이래로 칼리디 또한 철저하고 집요한 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최근 저서들에서 미국이 중동국가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지닌 제국주의적 성격,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국가의 설립을 저해하는 방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에 대해 뉴욕 포스트 지는 2004년에 그가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고 비난했고, 또한 그의 에드워드 사이드 석좌교수직이 몇몇 아랍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 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수의 학생 연합이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대학교수들을 감시하고 있다
칼리디를 희생자로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 공격이 점차 미국의 여러 대학 캠퍼스 내에서 빈번해지고 있다. 여러 조직에 속한 학생들은 칼리디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힌 교수들의 말과 행동을 조사할 임무를 띠고서 그들을 비난하고 고발하는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보스턴의 더 데이비드 프로젝트(The David Project)라는 유대인리더십센터는 2004년에 콜롬비아 대학의 조셉 마사드와 조지 살리바 교수가 유대인 학생들을 괴롭힌다는 가상의 내용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더 데이비드 프로젝트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카터의 저서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른 개 이상의 글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인권 수호 기구와 미국의 여러 재단들의 활동을 분석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러 인터넷 사이트와 그룹들도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여겨지거나 팔레스타인 조직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에 관계된 모든 행동들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칼리디를 “객관적이지 못하다”라는 이유를 들어 비난한 바 있는 캠퍼스 워치(Canpus Watch)는 강의실에서 이른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반대 발언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행동을 전개하고 있다. 극우 반이슬람주의자 다니엘 파프가 제작한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학생들은 교수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교수진을 둘러싼 긴장은 2006년에 국제관계를 전공한 두 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한 권의 에세이를 출간하면서 더욱 더 증가했다. 실제로 그들은 이 에세이를 통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대인 압력단체들”이 중동지역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들의 활동을 통해 조성된 분위기가 없었더라면 이라크 전쟁은 결코 발발하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에세이에 대한 반응은 아주 거세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뒤, 현대 유럽 분야를 전공한 영국 교수이자 리마크연구소(Remarque Institue; 뉴욕대학)의 책임자인 토니 저트 또한 반유대주의적 사고를 기치로 내세운 캠페인의 피해자였다. 그는 근동지역 분쟁의 유일한 해결책은 두 민족을 통합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가의 정립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저트 교수는 지금 변절자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10월, 반인종주의연맹은 뉴욕에 주재 폴란드 영사관에 그가 폴란드에서 하기로 예정되었던 강연을 취소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강연의 취소로 인해 맹렬한 논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저트는 한 이스라엘 일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적인 점령 정치를 계속하는 한, 이스라엘의 미래는 위태로워질 것이다.”(번역-변광배)
*글을 쓴 마리아노 아기레는 마드리드에 위치한 국제관계 및 대화를 위한 재단(FRIDE)의 평화, 안전, 인권 분야 책임자를 맡고 있다.
1)헨리 사이그먼, “허리케인 카터”, '더 네이션' 뉴욕, 2007년 1월 22일.
2)에단 브로너, “유태인, 아랍인들 그리고 지미 카터”, '뉴욕 타임즈' 2007년 1월 9일.
3) 데니스 로스, “지도를 가지고 장난하지 마시오”, '뉴욕 타임즈' 2007년 1월 9일.
4)Cf. 후세인 아그하와 로버트 말리, “캠프 데이비드:실수의 비극”, 뉴욕 도서 리뷰, 2001년 8월 9일, www.nybooks.com/articles/14380 ; 타냐 레인하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1948년 전쟁을 끝낸 방법', Seven Stories Press, 뉴욕, 2002, 30-60쪽. ; 알렌 그레쉬, “에후드 바라크의 ‘진짜 얼굴’“,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7월.
5)「민주주의여 지금!」이라는 제목의 프로 방영 중 에이미 굳맨과 제임스 카터 간에 있었던 대담, 2006년11월 30일. 이 프로의 재시청:
www.democracynow.org/article.pl?sid=06/11/30/1452225.
6)같은 대담.
7) 크리스 맥그렐, “분리된 세계”, '가디언', 2006년 2월 6일;
www.guardian.co.uk/israel/Story/0,,1703245,00.html
8)2006년 2월 20일,
www.camera.org/index.asp?x_context=2&x_outlet=69&x_article=1082
9)야이르 히르쉬펠드, 아비비트 하이, 게리 수스먼, '남아프리카부터 얻은 교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우에 대한 교훈', Friedrich Ebert Stiftung과 경제협동제단, 헤르츨리야(이스라엘), 2003년.
10)이안 파프,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 Oneworld출판사, 옥스퍼드, 2006년, 2-3쪽.
11)제롬 슬래터, “알 필요 없는 것”(타냐 레인하트의 저서 '지칭하는 곳 없는 이정표'에 대한 서평), '티쿤', 2007년 1월, 65쪽; www.tikkun.org. 이 잡지는 또한 카터의 인터뷰를 출간했다, “현재 통용되는 생각”, 2007년 1월.
12)라쉬드 칼리디, '철장:국가로서의 지위를 위해 투쟁하는 팔레스타인인의 이야기', Beacon Press, 보스턴, 2006.
13)라쉬드 칼리디, '부활하는 제국. 서구의 발자취와 중동에서의 미국의 위험한 행로', Beacon Press, 보스턴, 2004.
14)나단 R. 클라인필드, “중동지역 긴장이 콜롬비아 캠퍼스에서 개인화되고 있다”, '뉴욕 타임즈', 2005년 1월 18일.
15)http://davidproject.org
16)필립 케니코트, “지식은 힘과 동등하지 않다”, '워싱턴 포스트' 2004년 5월 13일.
17)www.campus-watch.org/article/id/2547. Cf. 조엘 베이닌, “감시하기와 정보를 제공하기”,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2003년 7월.
18)존 미어샤이머와 스테판 월트, “이스라엘의 로비”, '런던 도서 리뷰', 2006년 3월 23일.
19)토니 저트, “이스라엘:진퇴양난”, '뉴욕 도서 리뷰', 2003년 10월 23일.
20)토니 저트, “성장할 수 없는 나라”, '하아레츠', 2006년 12월 18일.
그렇다면 “지금 고인이 된 ‘이스라엘의 천적’ 야세르 아라파트의 대외관계 고문이었고, 나아가 대량 살상을 변명하고 나서기까지 했던“ 이 대통령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바로 제임스 카터이다. ”그는 도를 넘어 섰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분노한 뉴욕 포스트 지는 이 백악관의 전 주인이 밝힐 수 있는 모든 점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것을 민주당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전(前) 대통령(1977-1981)이 어떤 일을 저질렀기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가? 카터는 '팔레스타인:인종차별이 아닌 평화를'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한 권 집필했다. 그리고 그는 이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만약 탄압이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대에서 계속 된다면, 또한 만약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의 국가 건립을 주제로 협상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종차별 과 유사한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물론 이 상황이란 “두 민족이 같은 땅에 살고 있지만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 국민들이 억압과 폭력으로 팔레스타인들에게서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박탈하고 지배적인 입장에 서는” 그런 상황을 말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반인종주의연맹(ADL)은 여러 신문 지상에서 카터가 반유대주의를 표명했다는 기사를 실어 그를 맹렬하게 비난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비난에 맞서 카터는 자신의 그런 입장이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상황의 효과를 참고로 한 것이지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에 관계된 것은 아니었노라고 응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카터의 비교는 미국 유대인 공동체 일각으로부터 첨예한 반응을 유발시켰다. 이 공동체들은 반인종주의연맹의 입장을 따라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모든 비판을 반유대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민주당은 뉴욕 포스트 지의 권고를 경청했으며, 민주당 대표인 하워드 딘과 하원 의장 낸시 펠로시는 카터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 사건은 매우 난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거 기간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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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자들의 생각을 달랐다. 카터의 저서는 출간 이후 여러 달에 걸쳐 꽤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정치분석가이자 중동프로젝트의 책임자인 헨리 사이그먼의 평가에 따르면, 이 저서에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솔직한 의견이 담겨져 있으며, 이 저서로 인해 발생한 파장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미국의 정치 계층, 즉 민주당이나 공화당 의원들의 무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카터는 문제의 저서에서 삼십년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군대의 시나이 반도로부터의 철수와 관련된 캠프 데이비드협정(1978) 조인을 위해 이스라엘의 입장과 이집트의 입장을 조정했던 일에 대한 기억들과 당시 그 지역 지도자들과의 연쇄 접촉을 회고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그 당시의 분쟁에 대한 교훈적 해석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는 두 공동체가 국가를 소유할 필요성과 이스라엘을 위한 충분한 안전보장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면서 기존의 평화 유지를 위한 균형 잡힌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편견 없는 독자가 읽으면 이 저서는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터를 비방하는 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와 같은 비판은 결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억압이 계속된다면 테러리즘은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이 카터의 주된 주장이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지금과 같은 시기에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의당 스캔들로 여겨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주장이 아닌가? 카터는 또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통제와 식민지 지배는 신성한 땅에서 광범위한 평화 협정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이다. 팔레스타인들의 테러 행위를 비판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그러나 뉴욕 타임즈 지 비평가 에단 브로너에 따르면 “불충분한” 비판이다−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협정 이후 특히 평화 협정을 방해했던 장본인들은 바로 이스라엘 당국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어떻게 맨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이 UN 결의안 242조와 338조에 대한 존중을 포함한 평화 협정의 적용을 먼저 나서서 거절했는가를 상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결의안은 실제로 무력에 의한 영토의 탈취를 금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군대의 요르단강 서안 지대와 가자 지구로부터의 철수와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이스라엘과는 다른 정치적 실체로서 인정할 것과, 그들에게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온주의의 이상들―예컨대 자유의 모델이자 안식처로서의 국가를 만드는 것―
이 사라졌다
게다가 카터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즉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이스라엘 수상 에후드 바라크, 야세르 아라파트 사이에 정상회담(2000년 7월 24일)이 개최되었을 때, 팔레스타인들의 국가 설립과 관련해서 아라파트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제안이 없었다는 주장, 따라서 아라파트가 좋은 기회를 놓치고 평화 협정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이미 일반적으로 공인된 사실을 반박했다는 이유로 카터는 클린턴 대통령의 중동지역 특사였던 데니스 로스로부터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카터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다른 전문가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았다.
카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랍 세계와 유럽에서는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에 대해 고심을 덜하고 있다는 감정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영토 내에서 점령 세력에 속박되지 않은 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 비록 유럽과 아랍 세계에서 보편화되어 있다고 해도 이와 같은 주장은 실제로 미국에서는 아주 생소한 것이다.
전 대통령이자 평화와 분쟁 해결을 위한 카터연구소의 책임자인 카터는 또 다시 조지 부시 정부가 팔레스타인드를 포기함으로써 그들을 슬픈 운명에 처하도록 방조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한편, 이스라엘이 협정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부시와 올메르트 정부가 2007년 3월에 팔레스타인 연합정부 ―파타와 하마스― 와의 협상을 거부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종차별을 들먹임으로써 호된 공격을 받은 카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반복해서 하건 데 평화에 대한 대가는 곧 이스라엘 내부에서가 아닌 요르단강 서안지대와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자행되고 있는 분명 인종차별이다. 바로 이 지역들 내에서 가장 경멸적인 형태의 인종차별이 행해지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곳에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카터는 이 지역들 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조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우선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안전 보장책들, 그 다음으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폭력의 근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1967년 이전의 국경을 중심으로 그들의 국가를 소유할 권리에 대한 이스라엘의 재인정 등등이 그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요르단강 서안지대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훨씬 더 열악하고 견딜 수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 카터의 판단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에서는 다른 나라로부터 유입된 수많은 이주민들로 인해 팔레스타인들의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있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합법적인 제도를 통해 시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안전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식민지배자들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 점령 지역에서 자국민들의 삶과 기반시설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팔레스타인인들을 겨냥한 주도면밀한 통제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최근까지 뉴욕 타임즈 지의 책임자이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특파원이었던 조셉 렐리벨드는 아주 긴 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카터가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적용시키면서 이 개념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카터가 이 개념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리와 이스라엘이 행한 영토의 몰수 행위에만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랠리벨드에 따르면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으며, 인종차별과 이스라엘식 시스템 사이의 유사점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상황들을 비교하면서 렐리벨드는 이스라엘 정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족주의적 체제와 마찬가지로 영토를 점진적으로 탈취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정책이 시행되었을 때 법령에 따라 개인의 이동을 조정하는 매우 복잡한 허가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오늘날 이스라엘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왕래를 분류하고 제한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제도를 가동시키고 있다. 영국 신문 가디언 지의 예루살렘 특파원 크리스 맥그렐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국적과 거주지에 관한 일련의 법을 제정해서 한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자민족과 타민족에게 달리 적용하는 정부는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불의가 자행되는 곳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한 곳은 인종차별정책을 실제로 실행되었던 남아프리카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곳은 바로 이스라엘이다.”
실제로 크리스 맥그렐은 십년 동안 가디언 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의 여러 양상과 인종차별의 여러 양상을 비교함으로써 억압의 형태에서 뿐만 아니라 부과된 고통에서도 많은 유사성을 확인하고 있다. 예컨대 예루살렘 시가 제공하는 공공서비스의 측면을 보면, 종종 이 도시의 합병된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과 비교해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양질의 서비스가 행해지고 있다. 가디언 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긴밀한 군사적 관계에 대한 비교 기사가 게재된 직후, 미국 내 중동보고 정확성 검토위원회(Camera)는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훼손하고자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날조했다는 이유를 들어 맥그렐을 비난하고 나섰다.
사실 이스라엘 정부가 인종차별과 유사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비난은 심지어 이스라엘에서조차도 점점 더 빈번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이스라엘 법에 근거해 수년간 팔레스타인인들을 변호해 온 용감한 변호사 다니엘 사이드먼과 같은 사람들―, 그리고 인권 수호 조직들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과 이스라엘인들의 팔레스타인 영토 장악이라고 하는 이 두 시나리오를 연구해 왔다. 예를 들어 독일의 프레드리히-에베르트 사회민주재단은 협상 절차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변화에 관한 연구, 그리고 그로부터 교훈을 끌어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에 관한 세 가지의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배척은 1948년에 발생했던 75만 명의 추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이 배척 정책은 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히는 방식으로 계속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국가 건립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도록 했으며, 또한 멀리 떠나거나 아니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층민으로서의 제한된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이와 같은 해석에 따르면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 또한 그 민족에 대한 일종의 포위 방식이었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한 권의 저서에서 이안 파프는 자신의 조국이 팔레스타인 민족을 이주시키고 하층민의 지위에 따르도록 하기 위해 사용했던 억압적이고 제도적인 행태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 대통령 카터보다 더 급진적인 의견을 개진하면서 파프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만약 “인종청소”가 “민족적으로 혼합된 국민을 동질화하기 위해서 특정 영토나 지역으로부터 강제로 추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또한 만약 “이와 같은 추방의 의도가 추방시키는 자의 마음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다수 거주민들의 철거를 유발시키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지난 60여 년 동안 이 정책을 실행해 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에도 역시 득이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간행된 한 유태인 잡지인 티쿤(Tikkun) 지에 실린 한 기사에 따르면, 시온주의가 내세운 이상들 ―세계 속 유태인 공동체에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자유의 모델이 되는 국가를 만드는 것― 이 사라지고 있다. 가령 제롬 슬레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온주의의 꿈은 악몽이 되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인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보다 더 위험한 장소 없기 때문이고, 또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그들의 땅으로부터 빼앗은 원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카터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했던 비판들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라쉬드 칼리디의 저서에서 좀 더 자세하게 그 모습을 나타낸다. 2003년에 콜럼비아 대학의 에드워드 사이드 석좌교수직과 이 대학 중동연구소의 소장직을 수락한 이래로 칼리디 또한 철저하고 집요한 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최근 저서들에서 미국이 중동국가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지닌 제국주의적 성격,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국가의 설립을 저해하는 방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에 대해 뉴욕 포스트 지는 2004년에 그가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고 비난했고, 또한 그의 에드워드 사이드 석좌교수직이 몇몇 아랍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이루어 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수의 학생 연합이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대학교수들을 감시하고 있다
칼리디를 희생자로 만들었던 것과 유사한 공격이 점차 미국의 여러 대학 캠퍼스 내에서 빈번해지고 있다. 여러 조직에 속한 학생들은 칼리디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힌 교수들의 말과 행동을 조사할 임무를 띠고서 그들을 비난하고 고발하는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보스턴의 더 데이비드 프로젝트(The David Project)라는 유대인리더십센터는 2004년에 콜롬비아 대학의 조셉 마사드와 조지 살리바 교수가 유대인 학생들을 괴롭힌다는 가상의 내용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더 데이비드 프로젝트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카터의 저서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른 개 이상의 글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인권 수호 기구와 미국의 여러 재단들의 활동을 분석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러 인터넷 사이트와 그룹들도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여겨지거나 팔레스타인 조직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에 관계된 모든 행동들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칼리디를 “객관적이지 못하다”라는 이유를 들어 비난한 바 있는 캠퍼스 워치(Canpus Watch)는 강의실에서 이른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반대 발언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행동을 전개하고 있다. 극우 반이슬람주의자 다니엘 파프가 제작한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학생들은 교수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교수진을 둘러싼 긴장은 2006년에 국제관계를 전공한 두 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한 권의 에세이를 출간하면서 더욱 더 증가했다. 실제로 그들은 이 에세이를 통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대인 압력단체들”이 중동지역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들의 활동을 통해 조성된 분위기가 없었더라면 이라크 전쟁은 결코 발발하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에세이에 대한 반응은 아주 거세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뒤, 현대 유럽 분야를 전공한 영국 교수이자 리마크연구소(Remarque Institue; 뉴욕대학)의 책임자인 토니 저트 또한 반유대주의적 사고를 기치로 내세운 캠페인의 피해자였다. 그는 근동지역 분쟁의 유일한 해결책은 두 민족을 통합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가의 정립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저트 교수는 지금 변절자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10월, 반인종주의연맹은 뉴욕에 주재 폴란드 영사관에 그가 폴란드에서 하기로 예정되었던 강연을 취소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강연의 취소로 인해 맹렬한 논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저트는 한 이스라엘 일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적인 점령 정치를 계속하는 한, 이스라엘의 미래는 위태로워질 것이다.”(번역-변광배)
*글을 쓴 마리아노 아기레는 마드리드에 위치한 국제관계 및 대화를 위한 재단(FRIDE)의 평화, 안전, 인권 분야 책임자를 맡고 있다.
1)헨리 사이그먼, “허리케인 카터”, '더 네이션' 뉴욕, 2007년 1월 22일.
2)에단 브로너, “유태인, 아랍인들 그리고 지미 카터”, '뉴욕 타임즈' 2007년 1월 9일.
3) 데니스 로스, “지도를 가지고 장난하지 마시오”, '뉴욕 타임즈' 2007년 1월 9일.
4)Cf. 후세인 아그하와 로버트 말리, “캠프 데이비드:실수의 비극”, 뉴욕 도서 리뷰, 2001년 8월 9일, www.nybooks.com/articles/14380 ; 타냐 레인하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1948년 전쟁을 끝낸 방법', Seven Stories Press, 뉴욕, 2002, 30-60쪽. ; 알렌 그레쉬, “에후드 바라크의 ‘진짜 얼굴’“,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7월.
5)「민주주의여 지금!」이라는 제목의 프로 방영 중 에이미 굳맨과 제임스 카터 간에 있었던 대담, 2006년11월 30일. 이 프로의 재시청:
www.democracynow.org/article.pl?sid=06/11/30/1452225.
6)같은 대담.
7) 크리스 맥그렐, “분리된 세계”, '가디언', 2006년 2월 6일;
www.guardian.co.uk/israel/Story/0,,1703245,00.html
8)2006년 2월 20일,
www.camera.org/index.asp?x_context=2&x_outlet=69&x_article=1082
9)야이르 히르쉬펠드, 아비비트 하이, 게리 수스먼, '남아프리카부터 얻은 교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우에 대한 교훈', Friedrich Ebert Stiftung과 경제협동제단, 헤르츨리야(이스라엘), 2003년.
10)이안 파프, '팔레스타인의 인종청소', Oneworld출판사, 옥스퍼드, 2006년, 2-3쪽.
11)제롬 슬래터, “알 필요 없는 것”(타냐 레인하트의 저서 '지칭하는 곳 없는 이정표'에 대한 서평), '티쿤', 2007년 1월, 65쪽; www.tikkun.org. 이 잡지는 또한 카터의 인터뷰를 출간했다, “현재 통용되는 생각”, 2007년 1월.
12)라쉬드 칼리디, '철장:국가로서의 지위를 위해 투쟁하는 팔레스타인인의 이야기', Beacon Press, 보스턴, 2006.
13)라쉬드 칼리디, '부활하는 제국. 서구의 발자취와 중동에서의 미국의 위험한 행로', Beacon Press, 보스턴, 2004.
14)나단 R. 클라인필드, “중동지역 긴장이 콜롬비아 캠퍼스에서 개인화되고 있다”, '뉴욕 타임즈', 2005년 1월 18일.
15)http://davidproject.org
16)필립 케니코트, “지식은 힘과 동등하지 않다”, '워싱턴 포스트' 2004년 5월 13일.
17)www.campus-watch.org/article/id/2547. Cf. 조엘 베이닌, “감시하기와 정보를 제공하기”,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2003년 7월.
18)존 미어샤이머와 스테판 월트, “이스라엘의 로비”, '런던 도서 리뷰', 2006년 3월 23일.
19)토니 저트, “이스라엘:진퇴양난”, '뉴욕 도서 리뷰', 2003년 10월 23일.
20)토니 저트, “성장할 수 없는 나라”, '하아레츠', 2006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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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에 휩싸인 이자크 라빈
지난 세기를 다룬 역사책들 속에서 사람들은 1995년 11월 5일 한 유대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이스라엘 수상 이자크 라빈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암살자는 “오슬로협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 증에 있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정을 끝장내겠다는 강한 의지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한 바 있다. 이 협정은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호 원칙 선언에 대한 조인으로 본 궤도에 올랐었으며, 이 협정이 맺어질 경우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요르단강 서안지대와 가자 지구에 5년 동안의 자치권을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이 영토들에 대한 결정적 지위에 대해 협상를 벌인다는 내용도 또한 그 원칙 선언에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에 출간된 라빈의 전기를 쓴 역사가 요시 골드스타인만이 유일하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라빈)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오슬로협정은 성공했을 것이다.” 라빈의 암살 사건 이후 이스라엘과 외국의 많은 소식통들에 의하면, 그가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아싸드와 미국의 빌 클린턴에게 1995년 11월 중에 이스라엘-시리아 사이의 외교적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제안들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확약을 했다는 점은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된 바 있다. 신중하고 간접적이자 직접적이기도 했던 이 협상은 1948년 이래로 사실상 전쟁 상태에 있었던 이 두 나라 사이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라빈의 암살이라는 그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지 거의 12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파시스트적인 극우 세력은, 이 암살이 가져다 준 기쁨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매스컴을 통한 거의 광적인 캠페인을 벌여 암살자의 석방을 요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동정을 표시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매파” 정치인들은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겉으로는 이 암살자를 비난하지만, 그들이 수상에게 던진 “배신”이라는 비난의 죄목이 이 암살자의 의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내심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라빈의 정치 경력은 ―이스라엘의 미국 대사, 노동당 지도자, 국방장관, 수상 등등― 그 자신의 무훈에 기초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48년에 발발했던 전쟁 동안 라빈은 무력으로 리다(오늘날 로드)와 라믈레 시로부터 대다수 팔레스타인 아랍민족의 철수를 주도했다. 그 수자는 총 7만 명으로, 나크바(팔레스타인의 멸망, 즉 “대재앙”) 추방자 전체의 거의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수자이다.
1956년의 전쟁 동안 라빈은 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갈릴리에서 시리아로의 강제 이주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 전쟁 직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군의 사령부 심의에서 라빈은 “이송” 조치, 즉 팔레스타인인들을 그들의 땅으로부터 추방시키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1967년 6월에 이스라엘 군사령부의 참모장이었던 라빈은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과의 전쟁을 지휘했고, 그 결과 이 나라들의 광활한 영토, 특히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대 그리고 가자 지구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모전”(1969-1970)이 한창이던 때에 라빈은 ―그가 대사로 있던 미국에서― 이스라엘 정부로 하여금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에 대량 공습을 감행하도록 설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레바논 침공(1982) 때 그는 국방부 장관 아리엘 샤론에게 베이루트를 봉쇄할 것과 레바논 수도의 물과 전기 공급을 끊을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국방장관으로 있던 시절 라빈은 1987년말에 시작된 이른바 “돌맹이 봉기”라고 불렸던 첫 번째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그는 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이스라엘 군대에 폭도들의 “뼈를 부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일 년 반이 지난 뒤에 이와 같은 강경책으로 인해 삼백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여섯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또한 오천 이백 명의 아랍 쪽 부상자들과 천 삼백 오십 명의 유대인 부상자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난폭한 억압이 팔레스트인들의 폭동을 잠재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몇몇 이스라엘 정치가들과 군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가져다주었다. 즉 무력만으로는 1967년 전쟁 이래 점령당한 영토를 회복하고자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의지를 누를 수는 없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협상이라는 해결책 시도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오슬로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같은 이름의 협정 조인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었다. 그 절차에 따라 지속가능한 평화가 정립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처음에 라빈은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좀 더 단호하게 협상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점차 과격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민족주의 우익 집단들이 ―그 선두에 유대인 식민자들 가운데 극한주의자들이 섰으며, 이들의 세력은 점령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영토 내에서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포스터에 나치 유니폼을 입은 라빈 수상의 모습을 그려 넣을 정도로 점점 더 과격하게 오슬로협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협정을 거부하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인들의 돌격부대들이 이스라엘 시민들을 겨냥해 유혈이 낭자한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오슬로협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 협정을 조금씩 흔들고 마지막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몰고 간 주된 요인이 식민지배의 강화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 진영의 과격주의 세력의 행동들이었다는 점에는 아무런 논의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라빈의 암살자가 오슬로협정의 암살자였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라빈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라빈의 후계자들은 “그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개척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면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몇몇, 그리고 오슬로협정을 지지했던 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 협정을 완전한 실패작으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 협정을 이스라엘의 불행을 결정짓는 주된 이유라고까지 간주하고 있다. 이 협상에 문제가 있었으며, 라빈 자신도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최상의 경우 거기에 조인을 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만약 그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오슬로 협정은 성공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조셉 알가지 기자, 텔 아비브
21)'이자크 라빈, 전기'(히브리어로 됨), Schoken, 텔아비브, 2006년, 590쪽, 9셰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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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몽드 디플로마티끄
- 기사입력: 2007-12-02 19:34:23
- 최종편집: 2007-12-19 15: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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